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담담한 이야기. 흔히 소설에서 기대하는 흥미진진한 사건사고는 없으나, 계속 읽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책은 끝났지만, 분명하고 확실한 게 없는 요지경 세상에서 주인공 다디시는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게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per Normal - 평범함 속에 숨격진 감동 슈퍼노멀
재스퍼 모리슨. 후카사와 나오토 지음, 박영춘 옮김 / 안그라픽스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슈퍼노멀은 물건들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봅니다. 그냥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모든 것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또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의 분위기를 좌우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보노보노의 인생상담 - 20만부 판매기념 특별판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김신회 옮김 / 놀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 속에 살던 보노보노와 포로리가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다가와 인생상담을 해주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요. 보노보노와 친구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다니, 긴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허락된 선물을 받은 느낌입니다."

보노보노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보노보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읽다보면 어느 순간 보노보노 특유의 간질간질한 행복이 찾아올 것만 같은 책.

책을 읽으며,
일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즐거움이 있으며
일을 하지 않으면 이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는 포로리의 말에 감탄하고,
아무 할 일도 없는 날에는 똥이랑 오줌만 싼다는 보노보노의 말에 뜨끔했다.
죽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에
아무리 괴롭더라도 아직 살아 있는 게 더 즐겁다는 포로리네 아빠의 말에 숙연해졌고,
더 고생을 해봐야 사람 사귀는 것쯤은 매일 똥 누는 정도의 고통밖에 안 될거라며 화를 내는 울버 아저씨 때문에 웃다가,
뒤이어 나온 딱 한 사람이라도 친해질 것 같은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에
'역시 연륜이...'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고민과 걱정거리를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잘 해결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들의 해답은 참 명쾌했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고민일지라도 쉬운 단어로 복잡한 논리 없이 해결해 나간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자아에 대한 고민도, 고양이 똥 냄새가 너무 심하다는 고민도 차별 없이 진지하게 들어주며, 
심지어 잘 모르는 문제일 경우에는 숲속친구들한테 물어보러 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우리는 간결한 말과 단순한 대화 속에서 뜻밖의 해답을 찾는다.
때때로 진심을 다해 같이 생각해주는 사람 덕분에 큰 위로를 받는 날도 있다.
마치 자기 일인양 모든 질문에 최선을 다해주는 순수한 친구들의 대화를 읽으며,
우리는 위로와 삶의 쉼표를 선물 받는다.
여유를 되찾은 우리에게 지난날의 고민은 더이상 산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보노보노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터를 훔쳐라 - +3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 / 안그라픽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라 켄야다운 깔끔한 글솜씨를 담은 수필집.

아니, 이 분은 도대체 못 하는 게 뭐랍니까ㅠㅠㅠㅠ

디자이너와 편집자는 전혀 다른 분야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요즘 디자인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결국은 같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디자인도 편집이고 편집도 디자인이다.

아마도. 이런 문장이 있었다.

'디자인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디자인이다'라고. 정말 멋진 말이다.

누가 똑 부러진 말로 칭찬을 들을 때 칭찬을 듣는 쪽보다 칭찬을 하는 쪽이 더 훌륭해 보인다. 칭찬하는 자의 여유, 칭찬할 만한 내용을 발굴해 내는 뛰어난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 남을 추어주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그 인격을 절로 높여 주는 것이다.

짧은 디자이너 경험에 비추어 우아함이란 관리하거나 강제하거나 계획하는 것만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그것은 줄기차게 단련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갈고 닦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둔화시키는 것의 의미도 알고 자기 문화의 강점을 속속들이 아는 상태에서 모종의 절제를 발휘할 줄 아는 지성을 말한다.

지식이라는 것은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 같아서 자력 없는 자석으로 아무리 모래밭을 헤집고 다녀도 아무 것도 들러붙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쇳가루가 많은 모래밭을 찾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력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 하는 것이다.

기왕에 내가 디자인한 책인 만큼 매장에서 크게 한자리 차지하는 책으로 자랐으면 하고 바라지만, 이거야 작가한테 달린 일이다.

상자쟁이 혹은 과잉포장전

타이왕국립고궁박물원은...특히 옥이나 상아 조각의 지귀하기 그리 없는 기교에서는 장안의 쾌락을 넘어선 감히 헤아릴 길 없는 원한 같은 것이 느껴져 압도당하고 말았다.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체력이다.

공장이라는 곳은 안에 들어가 눈앞에서 보면 참으로 짜릿해서 어지간한 모던아트는 눈에 차지 않을 만큼 감동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창조성이라는 선과 자연을 가공하고 어지럽히는 폭력성이라는 악이 똑같은 비율로 동거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다...대체 누가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해 냈을까?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교묘한 시스템을 통해 얇은 양철판은 선명한 꼴을 갖춘다. 그 모습이 꼭 기적처럼 보인다.

분명히 실수는 없없다...그러나 정말로 이 디자인으로 충분할까? 더 개선한 점은 없을까? 내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을 엄청난 물량의 움직임이 한순간 어지럼증처럼 흔들어댄다. 하지만 기계가 맹렬한 속도로 돌기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어찌해 볼 길이 없다. 만에 하나 내 디자인이 실패작이라면, 그 실패가 내 눈앞에서 엄청난 수로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패실패실패실패실패샐패실패실패실패......

매사 귀찮아하는 나를 역동적인 상황에 밀어 넣는 수단으로 오로지 여행을 이용하고 있다. 하기는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행은 여행이다. 하루 종일 호텔방에 뒹굴어도 ‘아, 오늘은 충실한 호텔 라이프를 만끽할 수 있었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고, 낯선 땅의 비일상적 공간에 몸을 옮겨다 놓는 것 자체가 대단히 자극적이다.

아프리카 가봉산 목제 가면 한 깡. 파리의 한 벼룩시장에서 구한 물건인데, 원래는 두 개를 살 생각이 없었다. 값을 깎고 또 깎아 하나를 사기로 했는데 흑인 점원이 가게 안쪽에서 슬그머니 비슷한 가면을 꺼내 와서는 "이렇게 부부예요."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하나만 사는 것이 죄스러워 하는 수 없이 두 개를 샀다.

내 전문분야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물건‘을 만드는 디자인이 아니라 ‘사건‘을 만든다. 즉 사람 머릿속에 사건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보의 우주 - 디자인을 위한 상상력
나가하라 야스히토.미나토 치히로 외 9인 지음, 김남주 옮김, 이원곤 감수 / 안그라픽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수많은 별이 가득하지만 텅 빈 공간이 더 많은 우주처럼, 거대한 정보를 읽었지만 머리는 오히려 텅 비어버린 것 같다.

현실 세계에서 대상을 볼 때 우리는 자신의 신체도 함께 본다. 자신의 신체가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대상을 팍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평소 우리는 자신의 신체가 보이는 것에 대해 특별히 의식하고 있지 않다...물질 세계에서 행위하는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보고 있는 대상과 자신을 시각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대상을 보는 그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때 자신의 신체가, 보고 있는 대상과 자신을 대응시키기 위한 기준, 즉 존재하고 행위하는 자기를 ‘정위‘하기 위한 좌표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기‘ 속에 있는 ‘나‘는 ‘스크린‘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머리를 움직여봐도, 스크린 근처를 돌아다녀봐도, 스크린에 표시되는 ‘면‘으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있는 환경과 스크린공간이 ‘매질‘에서 불연속적임을 나타는다...즉 ‘나‘의 ‘신체‘가 자기와 대상을 연결하는 매듭이 ‘되지 못한다‘...‘자기 좌표계‘를 구축하기 어려운 것이다...‘자기 좌표계‘ 구축을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은..우리 소프트웨어 사용자에서 또 하나의 ‘환경‘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21줄 바둑판이나 23줄 바둑판이 아니라 좀 더 과감하게 101줄이나 1,001줄로 바둑판을 넓히면 어떻게 될까? 원칙적으로 바둑판의 크기에는 제약이 없다...바둑판이 커지면 귀나 변에 비해 중앙의 비율이 점점 증가하게 되므로, 그 바둑판에서는 돌 수방 진지의 효율을 떨어지지만, 좀 더 자유롭게 둘 수 있는 중앙 지향적인, 바로 ‘초우주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기반 환경을 오픈 크리에이션을 추진할 수 있음과 동시에, 온라인이나 도시공간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디지털 감시의 문제와 같은 폐쇄 시스템을 낳고 있다...이미 무의식적으로 사회에 내면화되고 있으며,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상호 감시하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예를 들어 제가 키보드에서 타이핑한 문자는 다른 사람이 타이핑한 문자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칠 때는 건반을 두드리는 방법이나 사람에 따라 소리가 전혀 다릅니다. 비록 컴퓨터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만지는 순간 각기 다른 표현으로 실현될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에 대한 어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의 생활을 디자인과 조화시키고 싶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저 자신의 몸과 정신을 조화시키고 싶어요. 이는 타인이 해줄 리 만무하죠.

지금 당장 컴퓨터는 변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어려워서 누구도 바꾸려고 하지 않지요. 저는 왠지 직감적으로 어떻게 하면 자기답게 바꿀 수 있을지 알 것 같기도 해서 존 마에다식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이것을 때때로 다른 사람도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어휘를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 예술의 본래 목표

이러한 배경에는 어린 시절 경험한 붓글씨 시간에서 기인한다. 글자 표본을 보면서 한 자 씩 연습한다. 그러나 표본대로는 쓸 수 없다...어떤 일정한 범위 내에서, 붓을 두는 위치가 흔들린다. (흔들려서 형태가 뭉개져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범위가 좁혀져서 어는 임계치에 다다르면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정확한 곳에서 붓을 꺾지 않아도 붕개지는 범위를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수긍이 갔다. 아무리 능숙한 단계에서도 우리가 쓰는 문자는 어떤 임계치 안에서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쓴 ‘아‘는 우연에 지나지 않는 ‘아‘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