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1
옛날 어느 가을에 기르던 흑갈색 토끼 한마리 수컷 찾아 뒷 산으로 갔어
놈은 발정난 궁뎅이 주체 못해 짝 만나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헤메다
제기랄 하필이면 내가 꼬아 놓은 철사줄 올무에 걸렸어
얼씨구 좋다구나 어른만 잡는다는 산토끼 한 마리 걸렸구나
장하다 횡재로다 어린 가슴 팡팡 뛰는데
살려고 펄펄 뛰는 놈 정신 없이 밟아 누르고
얼마 지나 숨 고르고 나서 보니 죽어가는 눈이 날 보고 있는거야
그제서야 내 토끼인 줄 알았어
그때나 지금이나 난 뒷북이야
철 모르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기르며 정든 놈 밟아 죽이고
왜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나 몰라 지금은 눈시울 잘도 붉히더구만
배고프고 허기진 가나한 뱃속 때문이었겠지
할아버지 드리려는 속셈이 아니였는데 동네에서 효부라 이름난 우리 큰 엄마는 이때다 하고
죽은 놈 털 베끼고 창자 빼고 토막내어 지지고 복고 할아버지께 여러 끼 보신해 드렸대
창자는 따로 모아 조카들 허기 채운다고 시래기 밀기울만 넣고 내장탕 끓여
삼촌들 모셔와라 사촌들 모여라 가족 가난 잔치 했대
십년 후 어느 날
세상 무서울게 없는 스물 두살 때 떠난지 오랜만에 고향 내려가니
숨 고르시던 할아버지 딱딱한 목침 베고 콜록 기침 자주 하시더니
이승 죽음의 냄새가 솔솔 여닫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어
그러시다 그러시다 하나님을 모르고 저승으로 떠나 가셨어
할아버지 2
세상은 넓다 누비며 펄펄 뛰기 시작 할 때 서른 세살
십년 후 세상 만만하다 교만 떨어대던 마흔 네살
그때 나는 사업이란거 하다 부도내고 말았지
사는 집 날리고 조상들 잠든 선산 날리고
숫가락 젓가락 밥그릇 빼고는
집안에는 온통 빨간 딱지 뿐이었지
어느 집 골방에 숨어 벽치며 울고 고민하다
눈물 씻고 고민 털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밀렸지
누군가 공항 출구에서 '잘 다녀 오세요' 하더군
난 뒤돌아 보지 않았어
소금기둥 될까 봐
비행기안에서 때 되니 한끼 저녘 식사가 나왔어
밥상 받고 한참이나 줄줄 흐르는 눈물이
목으로 가슴타고 아랫배로 흘러 내렸지
눈물 마르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 지더군
시원해지는 가슴이 감사의 마음이었나 봐
그때까지 난 하나님을 몰랐어
풀무 불에 달구어 정금 만드시려 코뚜레에
고삐 매어 뉴욕에 끌어다 놓으셨나 봐
요즘 내가 자주 하는 말이 뉴욕이 두번째 내 고향이래
한국 같으면 세번이나 강산이 변한다는세월이야
그럭 저럭 살다보니 시방 나도 할아버지 되었지
저승 가신 우리 할아버지하고
뉴욕의 이승 할아버지 나하고 다른 것 하나 있어
시방 나/손자 할아버지는 하나님을 아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