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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팔공국이란 나라에서 새 임금을 뽑았는데 

그 애비는 죽을 때까지 왕 노릇을 해먹으려는 자였다. 

백성은 섬기지 않고 

주색잡기 노름과 배때기에 기름기만 채우다가 

제 손으로 임명한 암행어사에게 칼을 맞고 죽었다. 


새 임금은 전임 홍어임금과 바보임금 둘이서 만들어 놓은 

선거 제도에 의해 백성들이 투표로 뽑았는데 

선거운동 당시 훅 가는 공약들을 많이 발표해 몰표를 몰아주었더라. 

그런데 임금이 되고 나서 채 일 년도 되기 전에 모든 공약은 헌신짝처럼 

벗어 던져버리고 제 애비를 닮아가는 모습에 온 백성들이 

몸서리를 쳤겠다. 


한데 이번 임금이 되기까지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포졸들과 

나라의 녹을 받아먹던 몇몇 장수들이 밤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상대방 후보를 깎아내리고 지금의 임금을 추어올리는 

을 몰래몰래 붙이고 다닌 덕이라. 


한수 이남의 알 만한 백성들은 군대를 일으켜 반란으로 임금이 된 

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지는 모르겠지만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 법

이런 낌새를 눈치챈 대 무리가 있었으니 이 모든 걸 까발리고 다녔더라. 

지에 몰린 임금이 포도대장한테 사건을 조사하는 시늉만 하라 시켰으나 

여주에서 올라온 나졸이 모든 걸 까발리니 

깜짝 놀란 임금이 나졸의 아랫도리 이야기를 들춰내며 고향으로 내쫓더라. 


제 애비는 다른 건 몰라도 사내의 아랫도리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임금이었으나 

지금의 임금은 못된 짓만 배워서 백성들을 미궁 속으로만 몰아넣더라 

이쯤 되니 포졸들은 자기네 식구들을 서로 잡아먹고 알아서 설설 기더라. 


임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곤룡포를 차려입고 이웃 나라로 나들이만 다니더라. 

에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패션쇼만 다닌다고 민심이 흉흉하자 유언비어를 단속하라! 

제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에서 파발만 띄우더라. 

이제는 남과 북, 동과 서가 아니라 나와 네가 완전 갈라섰더라. 

자, 이제 판은 벌어졌다. 

얼쑤! 


  -황인산 詩集  <붉은 첫눈>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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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졸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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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른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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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을 껴안고

열병을 앓았습니다.
온 몸 깊숙히
아픔이 박혔습니다

길가의 차돌맹이
클로버 잡초
하루살이 개똥벌래까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서글픔을 보았습니다

길 지나던 행인들이 
쌓아올린
언덕위 서낭당 돌더미가
와르르
무너져 버렸습니다


다만 시장에서 만난
참외와 포도 호박이
나를 반기고
바람과 그림자가
귓속말로 속삭였습니다
'고층 아파트가
네 고향을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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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하야 잠이 든다

물닭도 쉬이 어느 낯설은 논드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섧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달이면

갈거이와 함께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른 잎새에 올라 앉는  때가 나는 좋다

 

어느 처녀가  잎을  갈부던 결었노

어느 동자가  잎 닢  갈나발을 불었노

어느 기러기  순한 대를 입에다 물고 갔노

어느 태공망이  젊음을 낚아 갔노

 

 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 자국

 많은 어느  강을 날여간 강다릿배의 갈대 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두  사랑이었다

 

해오라비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다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골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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