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1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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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육성이 궁금하다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인디고 연구소 InK) 출판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영상 http://bit.ly/wAcj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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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비용

 

-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박용준

 

 

영화 <바더 마인호프> 중에서

 

 


 













“진실만이 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진실이 인정받지 못하면 …… 

몸은 계속 증세를 드러낸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 중에서


사랑을 고백한 후 거절당하는 경우
곧장 몸에서 열이 나고 아파오는데,
이는 나의 진실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적인 몸의 증상이다.


반대로 나의 진심을 상대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참는 경우에도 몸의 반응은 나를 괴롭힌다.
그렇기에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자
애쓰는 이 노역 또한 못할 노릇이다.

결국, 진실-말하기(dire-vrai)란
마음으로 몸을 어루만지는 행위이자,
몸으로 마음에 가닿는 행위인 법.

 

 

 

영화 <도가니> 중에서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어. 그건 뭐랄까. 정의(正義) 혹은 신성(神性) 혹은 좀 더 존귀한 것에 대한 갈망 …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거야.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 그것도 아주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어.”

- 공지영, 『도가니』 중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꾹꾹 누르는 것도 고통을 유발하지만,
진실을 세상에 털어놓는 것 또한 고통을 수반한다.


분명 진실에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극도의 쾌락을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쾌락의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 비용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진실은 분명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임이 분명하고,
진실이라는 이 어떤 것은 늘 느리게, 에둘러, 뒤늦게, 어긋나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파르헤지아스트(parrhêsiaste,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가진 자) … ‘파르헤지아’는 진실 되고,
연루되고, 위험에 빠진 말로 정의된다. 진실을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아무 데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생은 자신의 근본적인 상황의 진실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 프레데리크 그로,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중에서

 

‘파르헤지아parrhêsia’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열고, 입을 열고, 몸을 열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솔직해지는 것,
이것이 곧 진실이자, 자유libertas다.


말하자면,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해야 하는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를 말하게 하는 용기, 혹은 자유.


진실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순수한 것이며, 옳고 곧은 것이기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 어떤 위험을 초래한다 하여도,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반드시 고백되어야 하고,
말하지 못한 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영화 An Ecounter with Simone Weil 중에서

 

“진실은 보려면 볼 수도 있는, 그러나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다.”
- 이정우, 『가로지르기』 중에서

 















진실은 이처럼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의 용기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고,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며,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혹 진실이 이토록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생은 진실 없이는 건설될 수 없으며,
진실은 무너진 생까지도 재건하는 힘을 갖고 있기에,
결코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혁명인 이유다.

나날의 혁명이 없이는 우리 삶은 생명성을 잃게 되고,
일상의 진실이 없이 우리 삶은 빛을 잃게 될 것이기에,
진실을 생성하기 위해 우리는
이 고독한 고통을 버텨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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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양식


박용준

 

 

 

 

 

 

 

 

 

 

 

 

 

 

 

 

 

 

 

 

“우리는 ‘이별하면서(abschiedlich)’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는 슬픔과 고통이 반드시 따르지만, 우리의 상황을 거듭해서 새롭게 만들고, 이별 앞에서도 우리를 항상 새롭게 변화시킬 가능성 또한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는 애도를 피할 수 없다.”
- 베레나 카스트, 『애도』 중에서





























마냥 따뜻하기만 했던 봄날이 이내 지나갔듯,
사랑했던 사람이 불현듯 내 곁을 떠나가기도 한다.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사람도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연(緣)이라지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매번 아프기만 하다.

이별을 겪고도 아프지 않다면,
그/녀를 잊지 못해 서둘러 도피한 것이거나,
그/녀를 아프지 않을 만큼만 사랑했다는 것일지니,
우리는 사무치게 사랑한 그 크기만큼 늘 아프다.

매 순간 이별하는 존재(abschiedliche Existenz).
매 순간 이별하면서도 그 이별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존재, 인간.

 


 

 

 

 

 

 

 

 

 

 

 

 

 

 

 

 

 

 

 

 

 

사랑 대상Liebeobjekt의 상실 … 그 병리적인 슬픔은 슬퍼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책임이 있고 또 그렇게 원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자기 비난의 형태로 표출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우리는 이별하고 나서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우린 헤어진 걸까?
이별의 아픔을 채 겪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이 자기 모멸감.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별/상실 후에 오는 이러한 자기 비하는
우울증의 한 병리적 증상인데,
그러고 보면 이별한 모든 자아는 일견 우울증(멜랑콜리아)적이다.

그러니 실연 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별의 이유를 자기 탓으로만 돌리지 않을 것.

대개의 이별에는 이유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할 수 없거나 알 수 없기에
오직 우리가 할 일은 사랑했던 그/녀의 생을 존중해 주는 것.
이것이 이별에 대한 애도의 기본 양식일 수 있다.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훼손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타자에 직면해서, 즉 접촉, 냄새, 감정, 감촉에 대한 기대, 느낌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훼손된다.”
-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중에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변했는데,
그/녀가 가버리는 경우, 변한 모습만 고스란히 남는다.
어긋남이 남긴 이 훼손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단언컨대, 만남 이전의 나(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에는 상처가 났고, 몸은 이미 훼손되었으니,
상처를 인정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만이 가능한 일.

이별의 이유를 따져 묻거나, 떠나간 그/녀를 원망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할 뿐,
그 어떤 가능성도 품게 하지 못하기에,
그/녀를 향했던 리비도(에너지)의 방향을 과감히 철회하는 일이
필요하다.
때론 마음을 접는 체념도 애도의 한 양식이기에.


 

 

 

 

 

 

 

 

 

 

 

 

 

 





 

 

 

 

 

 

 

 

 

 

 

 

 

 

 

 

 

 

"애도는 그런 것이다.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기.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연인의 사라짐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슬픔을 진정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뒤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쏟아지는 슬픔을 그대로 견뎌내야 한다. 슬픔이     짓무르고 곪아 터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상처의 아문 흔적이 사랑의 훈장처럼 빛날 때까지."
-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중에서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그/녀`를 향한 삶의 방향을 철회하는 것.
말하자면 애도의 핵심은
그/녀를 붙잡지 않는 것,
떠나감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감정의 동요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만큼이나 힘에 부치는 작업일지 모르나
우리는 애도하지 않고는 삶을 버텨낼 수가 없고,
깊은 슬픔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는 슬픔을 견뎌낼 수가 없다.

상처가 짓무르고 곪아 터지고 난 후에야 새살이 돋아나듯,
애도의 작업이 완결된 후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자유를 꿈꿀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애도하는 법도 배워야만 한다.
그래야 이별도, 사랑도, 배신이나 죽음에도, 온몸으로 부딪혀 버텨낼 수 있는
영혼의 근육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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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아이러니

 

박용준

 

 

 

 

 

 

 

 

 

 

 

 

 

 

 

 

 










영화 <깃> 중에서



“행복, 그것은 현실이란 말처럼 환상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미친다. 환상적이 아닌 어떤 것도 우리를 미치게 하지 못한다.”

- 최인훈, 『역사와 상상력』 중에서




 













무엇이 그대를

미치도록 가슴 뛰게 하고, 죽도록 살고 싶게 만드는가.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다.

즉, 삶의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낸 후에만

비로소 행복이라는 지평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대개 삶이란 거저 살아지는 법이 없기에,

죽도록 아파야만 조심스럽게 다가올 희망을 품을 수 있고,

미치도록 살아야만 가까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이든 삶이든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심연의 본질에 닿을 수 없기에,

환상적인 것들에는 때론 미쳐봐야 한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그리곤 곧장 이별하지 않았던가.



 

 

 

 

 

 

 

 

 

 

 







 

“S 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 욕망을 고갈시키지 말 것, 오히려 더 많은 부드러움과 에너지로 재생시킬 것. 내 눈앞에 있지 않으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다. ...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희망이 조금,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 아니 에르노, 『탐닉』 중에서

 

환상 없는 삶은 금세 지루해지고,

희망 없는 삶은 쉽게 나태해진다.

그렇기에 환상이 ‘있으면 좋은 것’이라면, 희망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환상은 때론 우리를 미치게 하지만, 과하면 일상이 시시해지기 때문이고,

희망은 오지 않을 듯 아득하지만, 서서히 삶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에 대한 환상을 더 깊고 더 애틋한 설렘으로

조심스럽게 탈바꿈하는 것.

그래서 희망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여도 쉽사리 놓지 않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사 실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넘어서는 것. 그래서 사랑은 때때로 환상적이며, 그것이 환상적이라 하더라도 충만한 실감을 안긴다. 환상과 실감이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장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상상력이 없다면, 그 사랑은 진부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를 지치게 한다. 상상력은 일회성의 이벤트를 하는 기획력이 아니다. 그것은 연인끼리 서로의 정체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와 몸짓의 나눔이자, 언어와 몸짓의 생성이다.”

- 한귀은, 『이별리뷰』 중에서
















 

사랑의 희망, 혹은 희망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환상적이지만 충만한 실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판타지아(phantasia)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영혼에 일어나는 정서적 반향을 뜻한다.

 

사랑이란, 연인과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영혼의 미묘한 떨림이 아니던가.

연인의 살과 피부가 하나의 사실이라면,

서로의 살과 피부가 맞닿아 만드는 것은 환상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니 환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우리의 사랑/삶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



 

 

 

 

 

 

 

 

 








 

 

 

“희망은 하나의 비약이고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다. ... 실제로 그것은 예언적인 힘이다. 희망은 존재할 것이나 존재해야 할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희망은 아주 간단히 ‘그것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할 뿐이다.”

- G. 마르셀, 『존재와 소유』 중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믿는 것. 즉, 희망이라는 환상에 대한 신뢰는 꽤 중요하다.

이 예언적 믿음으로부터 희망은 도래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신약, <로마서> 8:24)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기 보다, 바랄 수 없음에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결국 삶도 사랑도

그 본질은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꿈꾸는 희망이란 분명

환상(적인 것) 그 자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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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박용준 



 

 

 

 

 

 

 









 

 

*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신형철,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중에서) 그러니 여기에서의 이별이란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참혹하게 겪을 수 밖에 없는 세속의 모든 경험을 통칭한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매사가 어긋난다.

결심이나 조심만으로 어긋남을 피할 수 없다.

어긋남은 차라리 구조이며,

세속이란 그 구조와 구성적으로 연루된 인간들의 관계, 그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긋남은 그것 자체로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해야 한다.­

- 김영민,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중에서

 

















‘어긋남’이라는 솔직한 현실의 한 단면을

우리는 언제쯤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할 수 있을까.

매사가 어긋남의 연속이자 반복이라는 이 빤한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

영혼의 상처와 감정의 소모는 여기서 온다.

그러니 어긋남과 엇갈림에는 이유가 없는 법.

혹은 그 이유가 너무 많거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 이병률, 「사랑의 역사」 중에서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

이 반복되는 지독한 노역(勞役).

도대체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등 뒤의 일.

이것이 사랑이고, 삶이고, 일상이다.

그러니 이러한 치받침이 결국은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사랑과 일상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사내는 그녀를 안고 입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못 견디게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마음은 사내에게 속삭였다. ‘지금이야, 지금이어야만 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순간 있잖아.’ 사내는 중요한 말을 하듯,

그리고 그 마음을 똑똑히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한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만졌다.

사내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마음의 답장이 전해지려는 순간,

창밖으로 한떼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기척과 함께

­누군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씹탱아! 그게 아니잖아! 저 새낀 항상 저래.”

방안의 공기는 외계의 소음에 찢겨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중에서

 

















은밀하게 고백하고 성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그 찰나에도,

세속은 이렇게 훼방을 놓는다.

그래서 초라하게 쪼그라드는 나.

하지만 이것조차도 우리 등 뒤의 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 노희경, <그들이 사는 세상> 중에서
















 

어긋남과 훼방은 일상 속 하나의 진실이다.

우리 각자의 한계란 결국 세속의 어긋남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어떤 무능과 같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이라고 알랭 바디우는 말했지만,

때로는 이러한 극복의 노력이나 의지가 나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듯 보이는 어떤 비극.

아니, 나의 노력도 결국 어긋남의 원리에 구속되어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엔 삶도 사랑도 희망도 어긋날 수밖에 없는 소박한 현실.



 

 

 

 

 

 

 

 









 

하지만 문제는 이 어긋남에 대한 무능이

용서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의문스럽다는 사실.

이쯤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베케트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를 인간 실존의 비극과 부조리의 영웅으로 불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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