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박용준 



 

 

 

 

 

 

 









 

 

*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신형철,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중에서) 그러니 여기에서의 이별이란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참혹하게 겪을 수 밖에 없는 세속의 모든 경험을 통칭한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매사가 어긋난다.

결심이나 조심만으로 어긋남을 피할 수 없다.

어긋남은 차라리 구조이며,

세속이란 그 구조와 구성적으로 연루된 인간들의 관계, 그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긋남은 그것 자체로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해야 한다.­

- 김영민,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중에서

 

















‘어긋남’이라는 솔직한 현실의 한 단면을

우리는 언제쯤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할 수 있을까.

매사가 어긋남의 연속이자 반복이라는 이 빤한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

영혼의 상처와 감정의 소모는 여기서 온다.

그러니 어긋남과 엇갈림에는 이유가 없는 법.

혹은 그 이유가 너무 많거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 이병률, 「사랑의 역사」 중에서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

이 반복되는 지독한 노역(勞役).

도대체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등 뒤의 일.

이것이 사랑이고, 삶이고, 일상이다.

그러니 이러한 치받침이 결국은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사랑과 일상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사내는 그녀를 안고 입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못 견디게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마음은 사내에게 속삭였다. ‘지금이야, 지금이어야만 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순간 있잖아.’ 사내는 중요한 말을 하듯,

그리고 그 마음을 똑똑히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한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만졌다.

사내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마음의 답장이 전해지려는 순간,

창밖으로 한떼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기척과 함께

­누군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씹탱아! 그게 아니잖아! 저 새낀 항상 저래.”

방안의 공기는 외계의 소음에 찢겨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중에서

 

















은밀하게 고백하고 성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그 찰나에도,

세속은 이렇게 훼방을 놓는다.

그래서 초라하게 쪼그라드는 나.

하지만 이것조차도 우리 등 뒤의 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 노희경, <그들이 사는 세상> 중에서
















 

어긋남과 훼방은 일상 속 하나의 진실이다.

우리 각자의 한계란 결국 세속의 어긋남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어떤 무능과 같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이라고 알랭 바디우는 말했지만,

때로는 이러한 극복의 노력이나 의지가 나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듯 보이는 어떤 비극.

아니, 나의 노력도 결국 어긋남의 원리에 구속되어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엔 삶도 사랑도 희망도 어긋날 수밖에 없는 소박한 현실.



 

 

 

 

 

 

 

 









 

하지만 문제는 이 어긋남에 대한 무능이

용서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의문스럽다는 사실.

이쯤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베케트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를 인간 실존의 비극과 부조리의 영웅으로 불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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