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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매우 정밀하고 매력적인 텍스트 읽기로 가득 차 있다. 저자인 마사 누스바움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잘 알려진 대로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 고전학자, 여성학자라는 수식이 붙어 있다. 아마도 여기에 빼어난 문학비평가라는 이름표도 붙여줘야 할 것 같다. 그가 서구의 문학 텍스트들 특히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E.M.포스터의 『모리스』, 월트 휘트먼의 「나 자신의 노래」 등을 분석하며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 추론의 상관관계를 깊이 논했기 때문이다. 1995년에 쓴 책이지만 한국에는 이제야 번역됐으니 한참 늦은 감이 있다. 2009년에 나온 마이클 셸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2010년 국내에 번역된 것과 비교해보면 말이다.'


사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은 고전적인 물음인 동시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음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 이어져왔으니 수천 년 된 물음인 셈이다. 누스바움은 자칫 공허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 질문을 ‘컨텍스트’화 함으로써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을 제시했다. 시카고대 법학과 학생들과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의 작품을 함께 읽으면서 미연방대법원 판례들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누스바움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공적 논쟁’의 영역에서 소화했다. 

로스쿨 학생들과 함께 읽은 소설들 
물론 로스쿨 학생들을 위한 ‘법과 문학’ 강의(1994년 봄)가 이 책의 배경이 됐다. 저자는 장차 변호사나 재판관, 정치가가 될 학생들과 함께 문학 작품들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동정과 자비, 공적 판단에서 감정의 역할, 그리고 나와 다른 타자인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것 등에 대해 토론했다. ' 

누스바움이 이런 판단과 행동에 이른 데는 이유가 있다.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인간 삶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발견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을 점점 더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러한 변화들에 의문을 품고, 이를 자신의 직업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심사숙고해 나갔다. 찰스 디킨슨이 말한 ‘비슷한 남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방식과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았는지 혹은 보다 다르게 살 수는 없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책의 목적도 명확하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이 책의 목적은 휘트먼이 바라보았던 미국이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공적 담론의 구성 요소들을 설명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구현할 수 있는 몇몇 역할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의 다른 한 기둥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과 함께 유엔대학 부설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서 한 국가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방법에 관해 공동연구를 진행한 데 있다. 센과 누스바움은 1인당 국민총생산량(GNP)와 같은 소득 수준에 초점을 둔 주류 경제학자의 모델에 반대해 ‘건강, 교육, 정치적 권리, 민족·인종·젠더의 관계’ 등을 포괄하는 다층적 측정법으로 삶의 짊을 평가하는 새로운 모델을 창시했으며, 이러한 접근법은 훗날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의 토대가 됐다.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것은 주류 개발 경제학이나 공공영역에서 규범적인 것으로 옹호돼 온 ‘경제적 공리주의’이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효율성이 제1의 가치이자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하는, 차가운 계산의 세계에서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시민이 생겨나기 어렵다. 이를테면 경제성장률 4%, 1인당 국민총생산(GNP) 2만 달러와 같은 숫자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런 대로 살 만해 보인다. 총합이나 평균수치가 사회의 분배 문제나 불평등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어도 그렇다. 문제는 숫자 이전의 생생한 현실에 대해 둔감해진다는 것. 그러나 눈앞에 구체적인 이름과 이야기를 가진 인물이 있다면,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고통에 쉽게 반응을 보이게 된다. 누스바움이 문학의 사회적 가치를 믿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학적 상상력은 공적 합리성의 한 부분이지만, 그 전체는 아니다. 감정을 이입하는 상상력이 원칙을 따르는 도덕적 추론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도로 위험한 것이며, 나 역시 그러한 제안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문학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정확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 (Martha C. Nussbaum, 1947~)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나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우리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문학은 그의 상황과 내면세계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한다. 독자들은 텍스트 속의 인물과 감정적 교감을 쌓아가면서 그가 놓인 상황에 감정이입 한다. 기쁨과 고통, 슬픔과 좌절, 연민과 분노, 사랑과 증오 등을 공감하게 된다. 소설을 통해 ‘비통하고 억울한 자들, 배제된 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세상의 불의와 참상을 목격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불평등보다는 평등에, 귀족적 이상보다는 민주적 가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단순히 문학의 힘을 옹호하기보다는 문학이 환기하고 보여주는 ‘공감’ 즉, 감정의 힘에 주목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감정은 오랫동안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됐기에 공적 추론 과정에서 배제돼 온 것이 사실이다. 누스바움은 고전학자답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로마의 스토아 학파, 스피노자, 칸트, 스미스, 벤담 등 역사 속의 다양한 철학자, 공리주의자, 경제학자의 사상을 넘나들며 공적 판단에서의 감정의 역할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저자도 고백했듯,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책을 기획하는 데 많은 영감을 줬다는 것은 책 곳곳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 혹은 ‘합리적 감정’의 옹호 
“나는 감정은 때로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려운 시절』과 같은 문학 작품을 통해 형성된 공감, 두려움 등의 감정은 합리적 감정(rational emotion)이 되기 위한 훌륭한 후보자들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후보자들’이 많아서 어느 것을 신뢰해야 할지 분별이 안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분별 있는 관찰자’ 개념에 주목,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스미스가 주장했듯) 그러한 가상적인 관찰자의 입장을 정립할 수 있게 해준다”는 논지를 제시했다. 누스바움은 애덤 스미스가 특정한 감정의 방향 제시를 공적 합리성의 핵심적인 요소로 믿었다는 것에 착안, 윤리학자였던 애덤 스미스가 이상적인 합리성을 두고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작품에 녹아든 다양한 인간 감정과 관계망을 공적 합리성의 영역에서 조명해볼 수 있다는 논리는 이렇게 해서 성립했다.


어떤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왜 다른 문학 장르가 아닌 소설을 강조했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다른 예술 장르가 아니라 왜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저자의 이런 대답을 들려줘야 겠다. “소설은 살아 있는 형태를 지니며, 사실상 여전히 그 중심은 도덕적으로 심오하면서, 우리 문화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허구 형식이라는 것이다. (……) 현대의 공적인 삶에 대해,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이 인간의 감정과 염원을 형성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매우 생산적이면서 우리의 숙고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황이 묘사돼 있는―장르에 주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책의 제목이 된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 대해 저자는 명쾌한 개념 풀이를 제시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시적 정의’는 “문학 안에서 사용되는 장치 중의 하나로, 선행은 보상을 받고 죄는 처벌받는다”로 요약된다. 저자가 책의 후반부에 휘트먼의 시를 가져오면서 ‘문학적 심판’, ‘시적 재판관’, ‘휴머니티를 위한 능력’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면, 저자 역시 이러한 일반적인 ‘시적 정의’를 좀 더 구체화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작품을 어떻게 읽었나

『어려운 시절』(찰스 디킨스)

이 소설은 과학적 정치경제학과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규범적 시각을 담고 있다. 소설은 분명 그러한 규범을 신랄한 풍자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통찰력을 가지고 풍자의 대상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공공정책 결정, 사회학 및 정치과학, 복지 및 개발 경제학 등에서 규범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의 보다 깊은 의미를 보여준다.


『모리스』(E.M.포스터)

소설의 감정적 구조는 독자가 주인공 모리스를 평균적인 인물로 여기는 편안함에 의존하다가, 해가 갈수록 사회가 그의 욕망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어떻게 그를 극도로 비정상적인 존재로 다루며 또한 불평등하게 대하는지에 대한 독자의 판단에 근거한다.


「나 자신의 노래」(휘트먼)

휘트먼은 특히 시인의 외침이 성적 배제와 대중의 비난에 의해 침묵해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로부터 장막을 걷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이 갖는 다양한 자유권과 평등권의 중요성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이러한 권리들을 다루는 중요한 길을 제시한다. 또한 휘트먼은 시적 상상력의 빛이 이 모든 소외된 자들을 위한 민주적 평등의 결정적인 동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오직 그러한 상상력만이 그들 삶의 사실들을 바로잡아줄 것이며, 그들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 속에서 개인의 존엄에 대한 훼손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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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비용

 

-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박용준

 

 

영화 <바더 마인호프> 중에서

 

 


 













“진실만이 몸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 진실이 인정받지 못하면 …… 

몸은 계속 증세를 드러낸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 중에서


사랑을 고백한 후 거절당하는 경우
곧장 몸에서 열이 나고 아파오는데,
이는 나의 진실이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적인 몸의 증상이다.


반대로 나의 진심을 상대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참는 경우에도 몸의 반응은 나를 괴롭힌다.
그렇기에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고자
애쓰는 이 노역 또한 못할 노릇이다.

결국, 진실-말하기(dire-vrai)란
마음으로 몸을 어루만지는 행위이자,
몸으로 마음에 가닿는 행위인 법.

 

 

 

영화 <도가니> 중에서

 

 














“내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어. 그건 뭐랄까. 정의(正義) 혹은 신성(神性) 혹은 좀 더 존귀한 것에 대한 갈망 …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을 향해 노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거야.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 그것도 아주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어떤 기쁨을 맛보았어.”

- 공지영, 『도가니』 중에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꾹꾹 누르는 것도 고통을 유발하지만,
진실을 세상에 털어놓는 것 또한 고통을 수반한다.


분명 진실에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온 몸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극도의 쾌락을 선사하면서도,
동시에 그 쾌락의 비용을 지불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이 비용은 충분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진실은 분명 “고통스럽기까지 한 어떤 것”임이 분명하고,
진실이라는 이 어떤 것은 늘 느리게, 에둘러, 뒤늦게, 어긋나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파르헤지아스트(parrhêsiaste,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가진 자) … ‘파르헤지아’는 진실 되고,
연루되고, 위험에 빠진 말로 정의된다. 진실을 말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서는
아무 데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생은 자신의 근본적인 상황의 진실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 프레데리크 그로,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중에서

 

‘파르헤지아parrhêsia’는 어원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을 열고, 입을 열고, 몸을 열고,
순수하고 단순하게 솔직해지는 것,
이것이 곧 진실이자, 자유libertas다.


말하자면,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해야 하는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를 말하게 하는 용기, 혹은 자유.


진실은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순수한 것이며, 옳고 곧은 것이기에,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 어떤 위험을 초래한다 하여도,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은 반드시 고백되어야 하고,
말하지 못한 이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영화 An Ecounter with Simone Weil 중에서

 

“진실은 보려면 볼 수도 있는, 그러나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다.”
- 이정우, 『가로지르기』 중에서

 















진실은 이처럼 위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에의 용기란,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고,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며,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봐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설혹 진실이 이토록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생은 진실 없이는 건설될 수 없으며,
진실은 무너진 생까지도 재건하는 힘을 갖고 있기에,
결코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혁명인 이유다.

나날의 혁명이 없이는 우리 삶은 생명성을 잃게 되고,
일상의 진실이 없이 우리 삶은 빛을 잃게 될 것이기에,
진실을 생성하기 위해 우리는
이 고독한 고통을 버텨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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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양식


박용준

 

 

 

 

 

 

 

 

 

 

 

 

 

 

 

 

 

 

 

 

“우리는 ‘이별하면서(abschiedlich)’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는 슬픔과 고통이 반드시 따르지만, 우리의 상황을 거듭해서 새롭게 만들고, 이별 앞에서도 우리를 항상 새롭게 변화시킬 가능성 또한 포함된다. 이를 위해서는 애도를 피할 수 없다.”
- 베레나 카스트, 『애도』 중에서





























마냥 따뜻하기만 했던 봄날이 이내 지나갔듯,
사랑했던 사람이 불현듯 내 곁을 떠나가기도 한다.

세상에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사람도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연(緣)이라지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매번 아프기만 하다.

이별을 겪고도 아프지 않다면,
그/녀를 잊지 못해 서둘러 도피한 것이거나,
그/녀를 아프지 않을 만큼만 사랑했다는 것일지니,
우리는 사무치게 사랑한 그 크기만큼 늘 아프다.

매 순간 이별하는 존재(abschiedliche Existenz).
매 순간 이별하면서도 그 이별을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존재, 인간.

 


 

 

 

 

 

 

 

 

 

 

 

 

 

 

 

 

 

 

 

 

 

사랑 대상Liebeobjekt의 상실 … 그 병리적인 슬픔은 슬퍼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책임이 있고 또 그렇게 원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자기 비난의 형태로 표출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중에서


우리는 이별하고 나서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우린 헤어진 걸까?
이별의 아픔을 채 겪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이 자기 모멸감.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별/상실 후에 오는 이러한 자기 비하는
우울증의 한 병리적 증상인데,
그러고 보면 이별한 모든 자아는 일견 우울증(멜랑콜리아)적이다.

그러니 실연 후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별의 이유를 자기 탓으로만 돌리지 않을 것.

대개의 이별에는 이유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할 수 없거나 알 수 없기에
오직 우리가 할 일은 사랑했던 그/녀의 생을 존중해 주는 것.
이것이 이별에 대한 애도의 기본 양식일 수 있다.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훼손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타자에 직면해서, 즉 접촉, 냄새, 감정, 감촉에 대한 기대, 느낌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훼손된다.”
-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중에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변했는데,
그/녀가 가버리는 경우, 변한 모습만 고스란히 남는다.
어긋남이 남긴 이 훼손을 다시 원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단언컨대, 만남 이전의 나(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에는 상처가 났고, 몸은 이미 훼손되었으니,
상처를 인정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는 것만이 가능한 일.

이별의 이유를 따져 묻거나, 떠나간 그/녀를 원망하는 것은
에너지를 소모할 뿐,
그 어떤 가능성도 품게 하지 못하기에,
그/녀를 향했던 리비도(에너지)의 방향을 과감히 철회하는 일이
필요하다.
때론 마음을 접는 체념도 애도의 한 양식이기에.


 

 

 

 

 

 

 

 

 

 

 

 

 

 





 

 

 

 

 

 

 

 

 

 

 

 

 

 

 

 

 

 

"애도는 그런 것이다.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기.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연인의 사라짐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 뒤를 돌아봄으로써 슬픔을 진정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뒤를 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쏟아지는 슬픔을 그대로 견뎌내야 한다. 슬픔이     짓무르고 곪아 터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상처의 아문 흔적이 사랑의 훈장처럼 빛날 때까지."
-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중에서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그/녀`를 향한 삶의 방향을 철회하는 것.
말하자면 애도의 핵심은
그/녀를 붙잡지 않는 것,
떠나감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감정의 동요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만큼이나 힘에 부치는 작업일지 모르나
우리는 애도하지 않고는 삶을 버텨낼 수가 없고,
깊은 슬픔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는 슬픔을 견뎌낼 수가 없다.

상처가 짓무르고 곪아 터지고 난 후에야 새살이 돋아나듯,
애도의 작업이 완결된 후라야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자유를 꿈꿀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애도하는 법도 배워야만 한다.
그래야 이별도, 사랑도, 배신이나 죽음에도, 온몸으로 부딪혀 버텨낼 수 있는
영혼의 근육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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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아이러니

 

박용준

 

 

 

 

 

 

 

 

 

 

 

 

 

 

 

 

 










영화 <깃> 중에서



“행복, 그것은 현실이란 말처럼 환상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미친다. 환상적이 아닌 어떤 것도 우리를 미치게 하지 못한다.”

- 최인훈, 『역사와 상상력』 중에서




 













무엇이 그대를

미치도록 가슴 뛰게 하고, 죽도록 살고 싶게 만드는가.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다.

즉, 삶의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낸 후에만

비로소 행복이라는 지평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대개 삶이란 거저 살아지는 법이 없기에,

죽도록 아파야만 조심스럽게 다가올 희망을 품을 수 있고,

미치도록 살아야만 가까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사랑이든 삶이든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심연의 본질에 닿을 수 없기에,

환상적인 것들에는 때론 미쳐봐야 한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그리곤 곧장 이별하지 않았던가.



 

 

 

 

 

 

 

 

 

 

 







 

“S 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 욕망을 고갈시키지 말 것, 오히려 더 많은 부드러움과 에너지로 재생시킬 것. 내 눈앞에 있지 않으면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다. ...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희망이 조금,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다.”

- 아니 에르노, 『탐닉』 중에서

 

환상 없는 삶은 금세 지루해지고,

희망 없는 삶은 쉽게 나태해진다.

그렇기에 환상이 ‘있으면 좋은 것’이라면, 희망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환상은 때론 우리를 미치게 하지만, 과하면 일상이 시시해지기 때문이고,

희망은 오지 않을 듯 아득하지만, 서서히 삶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에 대한 환상을 더 깊고 더 애틋한 설렘으로

조심스럽게 탈바꿈하는 것.

그래서 희망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하여도 쉽사리 놓지 않는 것.

이것이 필요하다.




 

 

 

 

 

 

 

 

 

 

 



 

 

 

 

 

 

 

 

 

 

 









“사 실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넘어서는 것. 그래서 사랑은 때때로 환상적이며, 그것이 환상적이라 하더라도 충만한 실감을 안긴다. 환상과 실감이 공존하는 아이러니의 장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상상력이 없다면, 그 사랑은 진부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를 지치게 한다. 상상력은 일회성의 이벤트를 하는 기획력이 아니다. 그것은 연인끼리 서로의 정체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와 몸짓의 나눔이자, 언어와 몸짓의 생성이다.”

- 한귀은, 『이별리뷰』 중에서
















 

사랑의 희망, 혹은 희망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충분히 환상적이지만 충만한 실감을 안겨줄 수 있는 것.

 

그리스 철학에 따르면 판타지아(phantasia)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영혼에 일어나는 정서적 반향을 뜻한다.

 

사랑이란, 연인과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영혼의 미묘한 떨림이 아니던가.

연인의 살과 피부가 하나의 사실이라면,

서로의 살과 피부가 맞닿아 만드는 것은 환상적인 그 무엇이다.

 

그러니 환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우리의 사랑/삶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



 

 

 

 

 

 

 

 

 








 

 

 

“희망은 하나의 비약이고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다. ... 실제로 그것은 예언적인 힘이다. 희망은 존재할 것이나 존재해야 할 것에 관계하지 않는다. 희망은 아주 간단히 ‘그것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할 뿐이다.”

- G. 마르셀, 『존재와 소유』 중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다(cela sera)라고 믿는 것. 즉, 희망이라는 환상에 대한 신뢰는 꽤 중요하다.

이 예언적 믿음으로부터 희망은 도래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신약, <로마서> 8:24)

바랄 수 있는 것을 바라기 보다, 바랄 수 없음에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결국 삶도 사랑도

그 본질은 환상(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꿈꾸는 희망이란 분명

환상(적인 것) 그 자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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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는 이유가 없다

박용준 



 

 

 

 

 

 

 









 

 

*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신형철, <이렇게 헤어짐을 짓는다> 중에서) 그러니 여기에서의 이별이란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참혹하게 겪을 수 밖에 없는 세속의 모든 경험을 통칭한다.
















 

“좋아해서 어긋나고 미워해서 어긋나는 일,

빨라서 어긋나고 늦어서 어긋나는 일,

부족해서 어긋나고, 지나쳐서 어긋나는 일을 두고

세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매사가 어긋난다.

결심이나 조심만으로 어긋남을 피할 수 없다.

어긋남은 차라리 구조이며,

세속이란 그 구조와 구성적으로 연루된 인간들의 관계, 그 총체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긋남은 그것 자체로 아직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해야 한다.­

- 김영민,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 중에서

 

















‘어긋남’이라는 솔직한 현실의 한 단면을

우리는 언제쯤 지긋하고 넉넉하게 응시할 수 있을까.

매사가 어긋남의 연속이자 반복이라는 이 빤한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

영혼의 상처와 감정의 소모는 여기서 온다.

그러니 어긋남과 엇갈림에는 이유가 없는 법.

혹은 그 이유가 너무 많거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 이병률, 「사랑의 역사」 중에서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

이 반복되는 지독한 노역(勞役).

도대체가 뜻대로 되지 않는 등 뒤의 일.

이것이 사랑이고, 삶이고, 일상이다.

그러니 이러한 치받침이 결국은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삶과 사랑과 일상의 윤리인지도 모른다.



 

 

 

 

 

 

 

 









 

 

“사내는 그녀를 안고 입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못 견디게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마음은 사내에게 속삭였다. ‘지금이야, 지금이어야만 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순간 있잖아.’ 사내는 중요한 말을 하듯,

그리고 그 마음을 똑똑히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한 손으로 사내의 얼굴을 만졌다.

사내는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마음의 답장이 전해지려는 순간,

창밖으로 한떼의 아이들이 지나가는 기척과 함께

­누군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씹탱아! 그게 아니잖아! 저 새낀 항상 저래.”

방안의 공기는 외계의 소음에 찢겨 초라하게 쪼그라들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중에서

 

















은밀하게 고백하고 성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그 찰나에도,

세속은 이렇게 훼방을 놓는다.

그래서 초라하게 쪼그라드는 나.

하지만 이것조차도 우리 등 뒤의 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 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 노희경, <그들이 사는 세상> 중에서
















 

어긋남과 훼방은 일상 속 하나의 진실이다.

우리 각자의 한계란 결국 세속의 어긋남 아래에서 허우적대는 어떤 무능과 같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이라고 알랭 바디우는 말했지만,

때로는 이러한 극복의 노력이나 의지가 나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듯 보이는 어떤 비극.

아니, 나의 노력도 결국 어긋남의 원리에 구속되어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결국엔 삶도 사랑도 희망도 어긋날 수밖에 없는 소박한 현실.



 

 

 

 

 

 

 

 









 

하지만 문제는 이 어긋남에 대한 무능이

용서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도 의문스럽다는 사실.

이쯤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베케트의 말이 생각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를 인간 실존의 비극과 부조리의 영웅으로 불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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