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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평점 :
#독서후기 [선한리뷰 2020-009] 걷는 사람, 하정우
글쓴이 : 하정우
출판사 : 문학동네
발행일 : 초판 2018년 11월23일, 1판 23쇄 2019년 11월29일
(어떤 책인가)
배우 하정우에서 걷는 사람 하정우로 변신한 책.
걷기와 독서를 한 꾸러미로 엮어준 책.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책.
(읽기 전에)
걷기를 막 시작했던 2018년 겨울. 배우 하정우가 걷기 관련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 서점마다 하정우 책을 추천도서로 내놓았고 대형서점에 가도 하정우 책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의 모습은 진솔하게 보였지만 연예인의 유명세를 가지고 책을 파는 것 같아 거부하는 마음이 컸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책 표지에서 보여주는 털털함만큼이나 책이 꾸밈없을 것 같았고 그래서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헌책방에 갈 때마다 이 책이 나왔나 눈여겨봤지만 ‘나온 지 1년 이내 책’ 코너에서도 이 책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났다. 2018년 처음 걷기를 시작할 때,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한겨울임에도 다양한 버전의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퇴근길에 지하철 2.5개 역, 6킬로미터를 걸어서 갔다. 한 시간 30분이 걸렸지만 겨우 세 정거장이었다.
그랬던 걷기가 조금씩 변했다. 2019년은 지하철 세 정거장을 걷는 일이 줄어들었다. 업무시간에 산책하듯 걷고 퇴근길에는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린 뒤 집까지 걸어갔다. 15,000보를 하루 목표량으로 세웠지만 겨우 목표를 채울 때가 많아졌다.
2020년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동력을 받아야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그렇다면 걷기를 좋아하는(좋아할) 사람이라면 걷기와 관련된 책을 읽어야 한다. 물론 2019년에 걷기와 관련된 책을 꽤 많이 읽었었다. 걷기와 관련된 책은 에너지와 같아서 계속 공급이 되어야 걷기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퇴근길에 지하철 망포역에서 내리면 선일초등학교까지 버스를 환승해 타고 갔다. 집까지 다섯 정류장이다.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야 하지만 전체 시간은 15분 내외가 걸린다. 새해 어느 날 도보로 얼마나 걸리나 지도로 시간과 거리를 재어보니 3킬로미터에 45분 정도가 나왔다. 이 정도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두어 번 시도했다. 집 가까이에 가면 허리가 아파왔다. 다시 포기하고 싶어졌다. 책을 읽자. 하정우. 그의 책이 떠올랐다. 새 책을 사야겠다.
(책 초입에서 만나는 하정우의 걷기)
재밌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갔다. 글을 쫄깃하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진솔하게 잘 쓴다. 그는 머리가 크고 발이 크단다. 팬들이 머리 크다고 ‘하대갈’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는데 그는 화도 안 내고 잘 받아들인다. 참 쿨한 배우다. 그러면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이 머리뿐만 아니라 발도 크다며 덧붙여 자랑한다. 나는 신발을 살 때 255~260문을 찾는다. 남자치고는 작은 편이다. 그렇지만 큰 발을 가진 남자라 해도 275 정도일 텐데 그는 300문 신발을 신어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이태원 같은 곳에서 신발을 살 수밖에 없다니 대단한 왕발이다. 콤플렉스거나 아킬레스 건이라 여겨질 그의 왕발에 대해 얼마나 겸손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의 글을 읽어보라.
“가끔 내 큰 머리에 어지러운 생각과 고민이 뭉게뭉게 차오르기 시작할 때면, 그 생각이 부풀어 머리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내 왕발이 먼저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머리 큰 내가 발까지 큰 건 분명 축복이다.” (07)
가끔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좀 유명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생색을 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하정우가 하루 1만보 정도를 걸으면서(물론 그 전에는 하루 3천보를 걷다가 1만보를 걷게 되면서 걷기 예찬 글을 쓸 수는 있다. 하지만 1만보로 책을 내다니. 물론 그 책에 자극 받을 사람은 분명히 있겠지만 많은 걷기 하는 사람들은 피식 웃고 말 것이다. 책을 쓰거나 말거나) 이런 책을 썼다면 나는, 에고, 아까워라. 그저 유명세로 뒤범벅된 책이구나. 건질 게 하나도 없네. 그러면서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을 것이다.
하지만 왕발이 하정우는 달랐다. 그는 정말 걷는 사람이었다. 그는 출근길에 1만6천 보를 걷는다고 한다. 내가 하루종일 목표로 삼는 걷기가 1만5천보인데, 일주일 중 완전히 지키는 날은 4일 내외다. 그가 정말로 걷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그는 거리를 말할 때, 편도 000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거리는 걷는 걸음으로 말해야 정확한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정도라면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는 걷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내 삶의 방식을 자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도 모두 다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11, 서문 /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책 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에게 반했다. 영화 『허삼관』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책인가)
하루 3만보, 가끔은 10만보,라는 1부 제목이 강하게 자극한다. 의기소침해진 나의 걷기를 다시 이끌어 줄 힘이 되어준다.
배우 하정우가 영화 “황해”로 상을 타면서 공약한 국토대장정 때문에 그의 걷기 인생이 시작된다.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만들었다는데 국민 배우 공효진과 함께한 ‘577 프로젝트’ 국토대장정 영화도 보고 싶다.
이 책은 하정우의 걷기 철학, 배우 철학, 영화 감독 데뷔하여 망한 이야기, 힘들 때마다 하와이에 가서 걷기 팀들과 걷고 먹고 오는 얘기들이 진솔하게 다양한 사진들과 함께 하와이 바다처럼 담겨져 있다.
영화 『터널』을 찍을 때 일주일 만에 수척해진 모습으로 변신해야 해서 제주도로 가서 걷기만으로 5킬로그램을 뺐다는 이야기에 역시 하정우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분에 지지 않고 걷기로 극복한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걷기로 이겨낸다. 그의 건강은 걷기로 인해 더욱 튼실해진다. 하루 3만보를 걷고 집에 오면 곯아 떨어지고 만다니 불면증으로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강력 추천해야겠다. 밤마다 같이 걷자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추워지면 외투를 입는 것처럼 나는 기분에 문제가 생기면 가볍게 걸어본다. 고민이 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31)
그의 이런 태도는 정말 본받을 만하다. 이제 나도 고민이 생기면 즉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일단 걸어야겠다. 어쩌면 걷기는 만병통치약인지도 모른다. 고민 통치약인가?
그는 배우로, 화가로, 감독으로, 걷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가만히 있지 못해 ADHD 아니냐는 말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들 걷기 팀은 대화를 하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서서 돌아다니며 대화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본다고 한다. 그는 주변의 이런 반응에 대해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며 그의 단점을 승화시킨다.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41)
그에게서 본받을 행동은 또 있다. 그는 단순 걷기 외에도 발 디딜 수 있는 공간만 있다면 무조건 걸어서 이동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동차는 물론이고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무빙워크 등은 가능한 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걸음수를 알뜰살뜰 모아 3만보를 만든다. 내가 있는 사무실은 7층인데 걸어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7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녔다. 이제 7층도 무조건 걸어서 올라가야겠다. 그는 걸으면서 행복을 느끼는 진정한 걷는 사람이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이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걷는다는 것, 이 투박하고 촌스러운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를 통해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71)
그는 걷기팀들과 수요 독서팀을 만들었다. 이런 조합을 봤나. 너무 대단한 걷기 팀이다. 걷기와 독서의 조화라니. 그의 궤변을 들어보자.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206)
그들은 무슨 책을 읽었나. 궁금했다. 그들이 읽고 얘기를 나눈 책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운을 부르는 변호사
걷기 예찬
최고의 휴식
센서티브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맨박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말의 한수
말의 품격
그는 힘들 때마다 더 걸어보라고 말한다. 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는 절대 회복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그의 이 말은 책 곳곳에 유행어처럼 몇 번 반복되어 나오는데 묘한 중독성이 있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선한리뷰]
힘든가? 그럼 걸어라!
많이 힘든가? 그럼 조금 더 걸어라!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