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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 -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하는 지혜로운 시간 ㅣ 하룻밤 시리즈
토마스 아키나리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9월
평점 :
서양철학을 하룻밤에 읽다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시간적인 요인은 그렇다 쳐도 과연 그 방대한 서양철학을 하룻밤에 읽어버리면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미안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적당히 짜깁기해서 만들어 놓은 기획도서라는 생각이 들고, 지금까지 그런 책들로 인해 약간의 피해망상증 비슷한 것도 생긴 터였다.
고백한다면 나는 대학시절 ‘동양철학 개론’ 과목에서 A+를 받았다. 당시 나는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던 공학도였고, 누군가에게는 필수과목으로 누군가에게는 교양과목으로 신청한 ‘동양철학’은 수강자가 200명이 넘어 대강당에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교수님은 A+은 딱 세 명에게만 준다고 공포를 했다. 200명 중 공대에서 수강신청을 한 학생은 단 세 명이라고 했다.
나는 그 수업을 들으며 다시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문과생인데 어쩌자고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을까. 하지만 내게 그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수업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그때 공부한 내용을 거의 다 잊었지만 내게 철학자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서양철학에 대한 관심 역시 지대한데, 삶의 궤적이 어쩔 수 없이 전공에 맞춘 기계쟁이 쪽이다 보니 철학이니 하는 쪽에 큰 관심을 쏟고 깊이 있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나 데카르트의 존재론 따위를 주섬주섬 과자 먹듯 몇 개 집어먹은 수준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한 명씩 깊이 들어가려면 일단 서양철학의 계보가 어떻게 되고, 어떤 사람들이 왜, 어떤 이유로 자신의 사상을 주장했는지 거시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했다.
『하룻밤에 읽는 서양철학』은 결코 하룻밤에 읽을 수 없는 방대한 양을 담고 있지만, 제목을 보면서 일단 책을 펴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부제로 적힌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한다는 글귀는 뭔가 살짝 낚이고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는 독자들은 무심히 넘길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 부제목 ‘쉽게 읽고 깊게 사유’한다는 말은 쉽게 읽고 쉽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진짜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반드시 깊게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기 것으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 나 책 한 권 읽었어. 하는 자기 만족 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일본 사람이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행동하는 지성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주오(中央)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조치대학에서 신학부를 졸업했다. 그런 때문인지 저자의 19개 철학 사조는 큰 틀에서 보면 ‘신’을 찾아가는 여정처럼 보인다.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중반부까지 철학자들은 내내 이 문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다.
1장 ‘사색하는 사람들의 기원’이라는 제목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예수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루고, 2장은 ‘신을 파헤치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버클리, 흄, 칸트, 헤겔을 다룬다. 3장부터는 현대 사상으로 넘어와 ‘인간에게 존재를 묻다’란 제목으로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비트겐슈타인,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마르크스, 알튀세르, 데리다, 들뢰즈, 제임스, 듀이, 로티를 설명하며 마친다. 그러니까 중세 철학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미국의 실용주의까지 19개 영역에서 30명의 철학자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깊이 있는 책이 아니다. 서양철학을 처음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철학의 맛을 보여주는 마중물 책이다. 철학이라고 하면 매우 난해한 이론들이 독서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데, 저자 토마스 아키나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대중 철학서적을 집필한 경험으로 매우 이해하기 쉽게 철학자들의 이론을 설명해준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꼽을 수 있는 데. 저자는 하나의 이론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인 상황에서 이를 설명한다. 그 의지가 대단하고 서양철학을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념해야 할 점은 각 철학자와 이론이 매우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짧게 기술되어 있어 그 부분이 장점이 되거나 단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책 분량이 300쪽을 넘기고 있는데, 더 자세히 하면 아무도 책을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관심이 가는 철학 사상이나 철학자를 발견했다면 이 책을 마중물 삼아 그 분야로 집중해서 다른 책을 찾아 가는 철학적 여정을 떠나기 바란다. 이 책으로 서양철학을 다 공부했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길 바란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모르던 생소한 철학자들도 만날 수 있었다. 저자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주었지만 짧은 내 지식과 이해력으로는 그 설명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특히 푸코, 라캉, 들뢰즈 철학자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고 피라노, 스키조 같은 용어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미국의 실용주의는 기본 개념은 이해했는데, 퍼스의 프래그머티즘과 긍정심리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아보고 싶다.
역시 책은 모두 마중물이다. 길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지식이 날마다 새롭다면, 날마다 하룻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