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거의 없다.
진실의 진위여부를 가린다는 것은
어쩌면 값어치가 있는 행위일는지는 몰라도
필요성은 거의, 아니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진실이라는 단어 속에 강요되고 있는
그 신뢰성을 의심치 않다.
어느 누구 하나도 '왼쪽이 없는 오른쪽'
혹은 '이면이 없는 표면'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진실이란 다만 그 반대편에 놓인 거짓이 있을 뿐
진실 자체의 어떤 옳고 그름의 분류는 상상도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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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의 '시점' 혹은 '의미의 약속'에 관한 것이다.
거짓으로 탄로난 진실은 부지기수다.
그리고 앞으로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진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진실로 결정되기 이전의 것들이라는 변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 '시점'상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이 '시점'에 관계된 문제를 다소 팽창시켜본다면,
과연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이 단어의 의미는
쪼갤 수 없이 많은 시간의 사이사이마다
무한한 태도로 변화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지금 이순간의 어느 진실의 명제 하나가
그 명제의 마지막 글자를 적어내리는 순간,
이미 거짓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 영원한 직선은 그을 수 없으며
또한 완벽한 원(圓)도 그릴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직선이라고 부르는, 원이라고 그려내는 그것들은
그저 완벽에 가까운, 끊임없이 완벽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오로지 정의내림만이 가능한 미완의 것들인 셈이다.
진실도 그렇다.
'영원한 진실은 없다.'던 그 어느 선자의 혼잣말이
이제와 내 가슴에 자꾸만 부대끼는 것은
그 부질없음에 기인한 어떤 염세주의 때문도
혹은 실존에 관계한 부조리 때문도,
득도한 현자의 새카만 눈동자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완벽,
즉 영원의 시점으로 다다르고자 노력하는 진실
그 의미 자체인 것이다.
끊임없이 진실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거짓의 다른 얼굴, 그것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실존적인
진실의 대응방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