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 뜨개질하는 남자의 오롯이 나답게 살기
이성진 지음 / 샘터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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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이성진

샘터

 

새로운 것에 늘 한 쪽 눈을 두고 있는 나는 호기심에 뜨개질을 시작했다. 여자다운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는 뜨개질을 하면 그래도 조금 고상한 아낙네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뜨개질은 한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직선같은 목도리 정도의 것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자며 옷이며,,,그러고 보니 뜨개질하는 남자가 우리 집에도 있었구나 싶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도시공학전공=뜨개질 취미인 남자의 조합이 조금 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항운 일을 배운 남자와 뜨개질을 하던 아버지도 예사롭지 않은 맞춤이다.

 

p28. 적당히 있어 보이는취미, 그게 손뜨개의 현주소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일수록 고유함을 빚는 행위는 빛이 난다.

 

뜨개질 초보자는 코를 빠뜨릴까 노심초사하며 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힐링이 되었다. 잡념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뜨개질의 매력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도구부터 갖췄다. 뜨개실을 담을 대바구니와 바늘세트, 실세트. 이제서야 좀 뜨는 여자로 보인다.

 

p52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오늘이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중이라는 것,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해도, 일 년 전과 똑같은 몸짓을 되풀이하는 듯해도 내 삶의 모자 뜨기는 차근히 몸집을 불리는 중이다. 편물의 패턴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단수링 없이도 중요한 지접을 곧잘 찾을 수 있기에, 나 역시 하루가 다르게 삶의 궤적을 읽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단수링이 없으면 헤맬 수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초보는 단수링을 걸어두고 하는게 좋다는 강사의 조언을 가볍게 듣고 감으로 이어갔던 뜨개질은 어느 순간에 코수가 늘어나 원하는 모양대로 가지 않았다. 단수링은 삶의 이정표쯤으로 생각된다. 이정표 없이 가려면 최적의 집중력을 발휘하던지 아님 경험이 많던지 이다. 초보자의 취미 생활은 이정표없이는 위험이 따른다.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p66 사연이 어찌 됐든 실이라는 녀석은 꼬여버리면 풀든지 끊어버리든지 해야 한다. 꼬인 실을 푸는 일은 설거지하다 물이 들어간 고무장갑을 벗는 일과 비슷하다. 빨리 해결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되려 지칠 뿐이다. 그럴 때는 그냥 호흡을 가다듬고 힘을 뺀 채로 천천히 시도하는 게 현명한 처사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읽으니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어진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이야기해주는데 왜 자꾸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p115 삶의 의미는 어디서 오는가. 살아가는 일의 의미가 지금의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서 오는 것이라면 나는 130만원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이 월급날이어서 그런지 통장에 찍힌 숫자와 나의 살아가는 의미가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나는 어느 정도 가치의 사람이란 말인가.

 

P122 한 줄로 서서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열을 이탈하는 행위는 실패로 가는 지름길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의 반 이상이 아파트에 살기를 바라고 서열화된 대학의 입구를 통과하는 것이 지상 미덕인 사회에서 자기만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일개 도피자일 뿐이다.

 

한동안 이런 생각만 했다. 어떻게 하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난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몸서리처질 정도로 고민하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나는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아파트에 평범한 가정주부와 매일 같은 출근을 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 속에서는 매일같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잖아를 외치지만, 아침 출근길의 나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인생이라고 속삭이며 다독이기를 수년째다. 25년 가까이를 한 직장에서 성실히 보내온 남편과 바람같이 살고 싶은 여자가 만나 하나의 인생길을 만들어 나가는데는 여러면의 타협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괜찮은 글을 읽었다. 잠시 여행다녀온 기분으로 읽었다. 작가는 설명하지 않고 그리듯 묘사하는 문장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틈새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며칠에 나눠 천.,히 읽기를 했다. 작가가 고심해서 써내려온 문장쓰기의 속도를 그나마 조금 맞춰주고 싶어서였다.

무용한 일, 남들이 바라보는 쓸모없고, 이득없는 일처럼 보이는 일들이 나에게는 한껏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멀리서 보여주고 있다. 풀려버린 뜨개실의 끝을 잡고 돌돌돌돌 말아오며 작가는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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