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러브
콜린 후버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노트북>과 <그레이> 사이, 바라던 딱 그 로맨스! 라고 해서, 노트북은 봤지만 그레이 시리즈는 한번도 읽지 않은 나는 애매했다. 적당히 야하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다 읽을 때쯤, 이게 중간이면 그레이는 얼마나 야한걸까, 하는 생각을 아득히 했다.


플롯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간호사인 테이트는 새 직장과 학교를 찾아 이사하면서 친오빠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오빠 코빈은 비행기 조종사로, 오빠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조종사들이다. 짐을 가지고 낑낑대며 오빠의 아파트에 도착한 밤, 테이트는 아파트 문 앞에 술에 떡이 되어 널부러진 한 남자를 맞닥뜨린다. 알고 보니 오빠의 친구였던 그 남자의 이름은 마일스인데, 키도 크고 잘생기고 눈은 투명하리만치 파랗고 금발에 몸이 좋고 동료 조종사들 중 가장 먼저 기장이 될 만큼 실력이 있는 데다 덤으로 비밀스러운 트라우마까지 있다! 당연히 테이트는 점점 마일스에게 빠져들고, 마일스도 뭔가 테이트에게 끌리는 것 같은데 태도가 영 애매하다. 그러던 중 마일스는 테이트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제안하며 두가지 조건을 내건다.


첫째, 과거를 묻지 말 것.

둘째, 미래를 기대하지 말 것.


여기까지 읽고 대체 이런 책을 왜 읽었어?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지금도 내가 뭘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반나절만에 다 읽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 사실은 중요하다. 콜린 후버는 노벨문학상을 탈 작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 작가의 문체와 표현력을 놓고 '마약작가'라는 애칭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소설은 테이트와 마일스가 만나는 현재, 그리고 6년 전 마일스의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 자체는 여자의 어딘가 일그러진 로망을 한 데 모은 느낌인데, 마일스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내가 10대 후반이었으면 이 소설의 마일스를 동경의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의 나이에 이 소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결국 마일스는 예쁜 쓰레기라는 거였다. 외모에 대한 묘사만 읽어도 이 남자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잘났다는 걸 나도 알겠는데, 사람이 아무리 잘났어도 (그리고 아무리 아픈 과거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죄책감도 없이 아프게 해서는 안되는 거니까.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테이트를 응원하면서도 어쩐지 아깝다는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여자랑 키스한 적은 얼마나 됐죠?"

"여덟 시간 됐죠."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눈을 들어 그를 보자, 그는 씩 웃었다. 내가 뭘 묻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똑같아요, 6년 됐죠."


플롯 자체는 마일스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못하지만, 마일스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 자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특히 테이트를 잃을 위기에 놓인 그가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레이철을 6년만에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소설 전체에 걸쳐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느껴졌다.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는데, '고통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는 레이철의 담담한 위로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아픈 사건들에 대한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다만 기쁜 일이 하나둘씩 늘어가면, 하루를 통째로 차지하던 고통이 점점 이따금씩 찾아오는 고통으로, 아주 잘 지내다가 한번씩만 고개를 드는 고통으로 될 뿐이다. 그러니 고통이 사라질까봐, 혹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남은 자리에 무엇을 채우는지, 우리가 결정할 뿐이다.


결국 마일스에 대한 사랑으로 미련한 관계에 스스로를 던지긴 해도 테이트는 참 매력적이었다. 강단 있고 멋있으면서도 또 한번씩 여리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진솔하게 다가오는 인물이었다.


남자는 검고 진한 눈썹을 치켜떴다. 눈썹이 잘생겼네. 그게 잘생긴 얼굴에 달려 있고. 잘생긴 얼굴은 또 잘생긴 머리에 달려 있고, 머리는 또 잘생긴 몸에 달려 있군. 결혼한 몸에 말이지.

망할 놈.


치근덕대는 유부남 딜런에 대한 속시원한 평가라거나, 그밖에 마일스에게 건네는 솔직한 고백들, 그리고 툭하면 과보호를 하는 오빠 코빈에 대한 밉지 않은 원망까지. 테이트는 참 예뻤다.


"과거를 마주 본다는 게 생각만 해도 얼마나 무서울지 안다. 모든 사람이 다 무서워하는 거지. 하지만 때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맞서야 하는 거다."


이 책에서 또다른 매력포인트를 담당하는 인물은 기장님이다. 등장인물들이 사는 건물의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은퇴한 후에는 엘리베이터 잡아주는 일을 하고 있는 노인인데,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한 유머감각과 따뜻한 시선으로 곧 테이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준다. 테이트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마일스의 상처를 지켜봤던 그가 중요한 순간에 던지는 이 한마디의 조언이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리고 마일스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그레이>를 안 읽었으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최근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섹시한 로맨스'에 '어글리 러브'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가 직접 겪고 싶은 로맨스는 아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걷어내고 나면)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특급 사랑 이야기다. 어찌되었든 마일스는 글로만 읽어도 참 잘생겼고, 테이트는 멋지다.  그리고 콜린 후버의 글은 잘 읽힌다. 너무 잘 읽혀서 문제다. 영화를 찍으면 마일스 역에 누구를 캐스팅할까, 그런 생각으로 며칠을 행복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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