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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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카피에 책을 펼치기 전부터 가슴이 시렸다. 대리기사로 직접 일해본 작가가 쓴 그 표현에는 부풀려 꾸며낸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그 세계를 경험해본 이에게는 어느 밤 앉았던 술 취한 타인의 운전석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구나, 그 전까지 살아가던 매일의 연장선에 불과했겠구나, 싶어서 서글펐다.


김민섭은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저자로 유명하다. 저자는 오랜 시간 몸 담았던 대학을 나오며 그 곳의 현실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대중은 공감으로 화답했다. 대학교 시간강사의 열악한 환경이 시간강사만의 문제가 아님을, 그 깊은 공명이 증명했다. '학문의 요람'이라는 대학에서보다 막노동을 한 맥도널드에서 노동자로서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던, 맥도널드에서 식자재를 나르며 처음 4대 보험이라는 걸 보장받고 당연한 노동조건을 약속받았으며 그게 너무 낯설어 매니저에게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물었다던(그리고 매니저에게 '법대로 하는 것 뿐'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던) 저자의 고백은 한 개인의 층위에 머무는 것이 아닌 셈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겹겹이 쌓인 부조리에 부딪히고, 나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불공평하지만 생계와 직결되는 그 노동에 몸을 맡기며 정의와 양심이 사치가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체득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틀을 깨고 나온 한 사람에게 말없는 응원을 보내준다. 그렇게 김민섭은 '지방시'를 썼고, '대리사회'로 돌아왔다.


대학과 맥도널드를 동시에 그만두고 한동안 글 쓰는 일에 매진하려던 그가 선택한 일은 대리운전이다. 모르는 사람의 운전석에 앉는 일, 그저 거나하게 취한 어느 장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거리만큼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 운전대를 잡은 그 순간 차 안 그 어디에도 '나'의 것은 없어서 없는 것처럼 스스로의 자취를 지워야 하는 일. 그 자리에 앉아 저자는 비로소 낯설어야 했던 그 곳이 전혀 생소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대리기사가 되고 나서야, 그동안의 삶이 대리인간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새로운 시선으로 저자는 사회 곳곳을 훑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말한다. 타인의 공간에서, 누군가를 대신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저자의 글은 잘 읽힌다. 표현이 어렵지 않고 가독성이 높다. 위트도 있고 계속 읽고 싶은 매력이 있다. 그런데도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주제가 무겁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인스턴트처럼 쉽게 해치울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글 자체가 인스턴트를,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쌓은 경험들로 빚어낸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매일 실습하던 학교 건물 화장실에는 비정규직 학생 조교의 실태를 고발하는 긴 글이 붙어 있었다. 당장 오늘 사회관계망의 우리 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평소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학자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너무도 기뻤지만, 지금의 전공도 공부도 정말 사랑하지만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그 길을 당연히 저버릴 수밖에 없다는 누군가의 담담한 글이 실렸다. 저자는 대학을 나왔지만 대학에서는 같은 일이 반복된다. 저자가 비운 자리는 지금쯤 누군가가 채워넣어 같은 고민에 쪼들리며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대리운전사처럼.


현실은 여전히 그렇다. 변화의 촛불 앞에서 읽는 현실은, 그래서 더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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