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비가 오면
현현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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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북폴리오에서 표지 투표를 진행할 때만 해도 여행 에세이인가 싶었는데, 막상 책을 받아서 펼쳐보니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 듬뿍 담긴 감성 에세이였다. 이런 건 내 감성이 아닌데, 하며 몇 장을 팔락팔락 넘기고 친구에게도 보여주었다. 친구 역시 우리는 이런 거 아니지, 했다.


책을 다 본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애틋함과 후회를 버무린 사랑 이야기는 내 취향이 아니다. 어떤 묘사에서는 으악, 하고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기도 했다. 내 손발, 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그러다 보니 글보다는 그림 위주로 보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일러스트는 섬세했고 컬러링이 감각적이었다. 그림 좋다,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강하게 들었던 느낌은 이거 실화 같네, 혹은 이거 작가님이 겪은 일 같네, 하는 거였다. 책에 써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허구라는 걸 이미 충분히 배운 후라고 생각했는데 짤막한 글마다 담긴 마음은 어쩐지 되게 진심 같았다. 내 감성은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일관적이고 진솔하고 담백했다. 그냥 그림에 맞춰 적당히 꾸며낸 '감성글'로 느껴졌다면 더 빨리 책을 덮었을 텐데, 그 진심이 눈에 밟혀서 한 자 한 자 열심히 봤다.


작가 후기에 이르러서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실제로 작가님이 그림을 시작하도록 응원해주고 따뜻한 힘을 전해주었던 그 시절의 여자친구가 지금 그리는 그림들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저지만

아직도 그것을 아름답게 해주는 건 그 친구가 아닐까 해요.

그러니 그림마다 일관되게 녹아있던 가난하고 힘든 시절 곁을 지켜주던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사라지지 않은 그리움, 어디서 무얼 할까 궁금하면서도 무엇이 됐든 그저 행복하기만을 빌어주는 따뜻한 마음은 정말 진심이었던 셈이다. 그 마음만큼은 나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책을 덮는 순간에서야 그 글들과 진심으로 통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과 같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는 법이니까.


이 책은 그리운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매뉴얼도,

혹은 그를 빨리 잊게 해주는 치료제도 아닙니다.

다만 그 시절 미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당연한 듯 지나쳤던 고마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별 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에 가득한 그 사람을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그 미소도 목소리도 다 잊어 가지만

회상할 때마다 마음에 차오르는 설렘과 따듯한 감사는

아직도 변함이 없네요.

어쩐지 어떤 감성적인 표현보다도 마음에 와닿았던, 담백하게 적힌 작가의 말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라폴리오 연재를 하며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게 책과 같은 제목의 일러스트, '파리에 비가 오면'이라고 한다. 사실 파리에 가본 적은 한번도 없다고 살짝 고백하는 작가의 말을 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러스트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사랑을 받았던 건 파리가 갖는 어떤 공통된 이미지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리가 뭐길래, 하다가도 에펠탑을 담은 일러스트를 가만히 쓸어보게 되는 내 마음이 그 반증이었다.



이 책에는 유독 동물, 그 중에서도 고양이가 많이 등장한다. 그 또한 파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어떤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홀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고양이의 뒷모습. 고양이의 마음을 알 리 없으면서도, 어쩐지 쓸쓸함을 야기하는 풍경.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고양이들이 참 예쁘고 좋았다.


  

그럼에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러스트나 글들은 담백하게 읽히는 것들이었다. 겨울의 문턱에 서서 사슴에게 야무지게 '집에 데려다 줄게'라고 말하는 꼬마 여자애를 상상하며 괜시리 마음이 간지러웠다. 물론 그건 남녀 이야기였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남자친구의 순애보였겠지만, 내게는 그게 아이의 순수한 마음으로 좀 더 와닿았다. 그런 게 그림 에세이의 매력 아닐까. 작가가 답을 정해두고 그림을 그렸다 해도 독자에게 얼마든지 상상의 영역이 남아 있다는 것, 짧은 글과 예쁜 그림에 제각기 이야기를 붙여 마음 속에서 곱씹을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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