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 대로
사노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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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젠가부터 꿈이 뭘까 생각하면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 이라는 답이 튀어나왔다.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잘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세월의 무게만큼 타인에게 너그러워지고, 편협한 경험에 갇히지 않은 채 변화하는 사회에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노인이 되어야지. 손자 손녀가 친구들에게 우리 할머니 진짜 멋있어,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꿈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레 함께 생각나는 사람이 사노 요코였다.

그러나 이 에세이집은 사노 요코가 아직 할머니가 되기 전, 중년의 나이에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니 '아침에 눈을 뜨면 바람이 부는대로'에서 만날 수 있는 사노 요코는 멋진 할머니가 아닌 멋진 아줌마, 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시절을, 가난하고 외로웠던 유학시절을, 그리고 아들을 낳고 엄마가 된 순간을 돌아보며 특유의 재치와 진솔함을 버무려 써내려간 글을 나는 한 편 한 편 소중하게 읽었다.

에세이를 읽었으면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마땅한데 어쩐지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읽은 후에는 늘 작가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만다. 어쩌면 글 한 편 한 편이 작가 그 자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노 요코의 글에는 자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다 가장 중요한 감정들만 끄집어내어 투박하게 빚은 뒤 부끄러움 없이 내놓은 듯한 티 없는 솔직함이 있다. 작가가 베를린에서의, 또는 밀라노에서의 유학 생활을 회상할 때면 어느새 나도 그 공간에 머물러 작가와 더불어 외로워하고 아파하고 있음을 느낀다. 오직 사노 요코만이 발견하는 일상 속의 작은 해학에 나도 열중하여 같이 소리 죽여 웃게 되고,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중년의 마음을 가늠하며 내 남은 세월을 생각한다. 그리고 점점 줄어가는 페이지가 아쉬워진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많이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런 생각 속에서 책을 덮는다.

사노 요코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글도, 일러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는 부족함을 당당하게 내보일 줄 아는 사람이고, 또한 당당하지 못한 순간에는 그 부끄러움조차 가감없이 보여주는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자비가 없는 만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의 작은 말과 행동에도 쉽사리 놀라고 상처받는 만큼 섬세한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아우른다. 그래서일까, 사노 요코의 글을 읽고 나면 위안이 된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등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았으면 하는,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중년의 모습을 한 글들이다. 그만큼 다르고, 또 여전히 사노 요코답다.

친구들의 위로와 격려에서 수험이라는 일상으로 돌아와 이젤 앞에 앉아, 올해야말로 합격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비어 있는 옆 의자에 평소 얘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지만, 얼굴을 마주치면 짧게 인사도 하고, 역까지 함께 가는 정도인 친구가 앉았다. 그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많이 힘들었지" 하고 한마디 건넸다. 나는 그 한마디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정말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43킬로그램이었던 내가 63킬로그램이 되고, 가슴은 1미터 4센티미터나 되어, 으앙 하는 아기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모성애의 화신이 되었다. 내 젖을 빠는 원숭이 같은 생물은 빛나는 천사였다. 필사적으로 젖을 빠는 아들이 여든 살이 되었을 때, 그 고독을 어떻게 견딜지 생각하니 벌써 눈물이 났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도, 태어날 때부터 줄곧 여자로 살아왔으니 남자는 어떤지 모른다.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좋아하니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이 나이에 뭘 어떻게 할 건 아니고, 남몰래 세로로 보고 대각선으로 보고 뒤집어 보고 하는 것이 무한한 즐거움이다. 그 정도는 신도 허락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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