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한국에 돌아온 해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한국어가 서툴러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말이 어설프다 보니 다른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자연' 시간 시험을 보며 곤충의 몸 구조에 대해 명칭을 적어야 했는데 각각의 부위에 대해 명확히 알면서도 그걸 뭐라 부르는지 몰라 빈칸으로 써냈던 기억이 난다. '머리', '가슴', '배'는 너무도 쉬운 단어였는데도. 아무튼 당시의 내 국어 실력은 딱 그 정도였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영어를 배웠다는 거였다. 독일에서 내가 배웠던 제2외국어는 이탈리아어였다. 영어라고는 컴퓨터 테트리스 게임에 나오는 'Ok'와 'Cancel', 'Game', 'Over' 정도를 알았다. 그러니 영어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교육과정의 일부였고, 나는 만 여덟살에 미처 다 익히지 못한 언어 두 개를 한꺼번에 배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배부른 고민이었다. 지금은 갓 만 서너살이 된 아이들이 똑같은 상황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한글을 떼는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에 가서 원어민 아이들처럼 영어를 익히도록 강요되는 세상이다. 그만큼 한국인의 삶에 영어가 일종의 강박으로 자리잡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 그토록 영어가 중요해진 걸까. 글로벌 시대를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영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도 업무를 수행하거나 학업을 이어가는 데에 아무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토록 영어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도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업무환경에서 능숙하게 대처할 만큼의 언어능력을 갖춘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누군가는 계속해서 영어의 중요성을 강요하는데 정작 영어능력을 기르는 교육정책은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 그 괴리가 고스란히 의미 없는 영어공부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으로 남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셈이다.

그 이유로 저자는 우리나라의 영어공부가 언어 자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으며, 이제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는 문화를 소통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문화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언어공부는 아무 소득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 문법으로 체계를 잡은 것을 넘어서서 한 문화권에서 성장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에 담긴 내용물을 보려 하지 않고 그릇의 생김새에만 열중하는 공부는 자연히 핵심을 비껴갈 수밖에 없다.

얼핏 5개 국어를 통달한 '언어 천재'가 들려주는 '영어 잘하는 비법'처럼 들리지만 이 책이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어학과 인문학을 어우르는 교양서가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는 단순히 '영어를 잘하기 위한 꼼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습득에 있어 문화가 지니는 중요성을 폭넓게 탐구한다.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영어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은 덤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영어가 늘지는 않아도 영어를 잘하려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은 잡을 수 있게 된다.

나는 결국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익히는 데에 성공했다. 더불어 원래 모국어였던 독일어와 고등학교에서 제3외국어로 배웠던 스페인어, 틈틈이 독학했던 일본어까지 나름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처럼 내 자신을 '언어 천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냥 말을 좋아했다. 언어라는 수단을 익힘으로써 얻게 되는, 타인과의 깊이 있는 소통이 좋았다. 우리말로 번역될 수 없는 그 나라에만 존재하는 단어를 아는 것, 그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게 즐거웠다. 어느 나라 말을 잘하게 됨으로써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많아지고,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읽을 수 있는 책이 늘어난다는 것이 기뻤다. 나는 정말로 필요에 의해 말을 익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의 언어 공부도 어떤 면에서는 이 책의 저자와 맞닿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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