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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양치기의 편지 - 대자연이 가르쳐준 것들
제임스 리뱅크스 지음, 이수경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어떤 일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길게 머물지 않은 산과 들판도, 그 곳으로 양을 몰고 가 풀을 먹이고 바람을 쐬이는 양치기의 낡은 지팡이도, 그 지팡이를 꾹 쥔 거친 손마디도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과 사람을 똑같이 품는 자연에 감사할 줄 아는 양치기의 마음은 몇백년 전 조상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책은 여전히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 한 남자가, 세계 어느 한 자락에서는 여전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잊어버린 다른 이들에게 띄우는 편지다. 저자는 단순하고도 진솔한 문장들로 아름다운 대자연에 대해,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집스럽고도 숭고한 삶에 대해, 그리고 하루하루 배워가는 삶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이야기한 글들은 모두 그 곳을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는 곳, 방랑자들이 여행을 떠나는 곳으로만 묘사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본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던 말답게 그의 글에는 고향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묻어난다.
저자는 어린시절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했던 몇몇 에피소드들을 회고한다. 물론 그 당시에 저자와 그의 친구들은 선생님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말썽쟁이들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선생님들은 고등교육을 받아 더 '좋은 직업'을 선택하기보다 고향에 남아 양을 치고 경작을 하며 살아가길 원하는 아이들을 인생의 실패자로 간주했다. 선생님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사랑했지만, 저자를 비롯한 아이들의 눈에 그 사랑은 잘못된 것으로 비춰졌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연에 그 곳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저자의 눈을 빌린 독자의 눈에도 선생님들이 너무하다 생각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더 많이 배워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 역시 농부, 목수, 어부 등의 직업을 가지기보다는 큰 도시로 나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전문직이 되기를 원하는 어른들에 둘러싸여 자란다. 시골에 남는 건 노인 뿐이고, 언젠가부터 '시골에 내려간다'는 건 도시 생활에서 실패한 이들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가장 놀라운 전문직은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을 만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르는데, 현대사회는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귀농이 또다른 유행으로 자리잡는다. '한달간 제주에서 살기'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그러다 정착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내달리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청개구리처럼 자연으로 눈을 돌린다. 쉴 새 없이 변해야만 살아남는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찾는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들을 산과 들, 바다는 아무 말 없이 품어준다.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언젠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모든 사람들이 양치기로 살 필요는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갈 필요는 없듯, 같은 이유로 말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리라는 게 있고, 모두가 그 자리를 오롯이 채울 때 세상은 올바른 방식으로 굴러간다. 그러니 '영국 양치기의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변치 않는 자연의 순리를 상기할 것, 인간임에 자만하지 말 것, 모든 굴레를 내려놓고 편해질 것. 자신이 사랑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일을 할 것.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허드윅 양을 몰며 초지를 가로지를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를 품은 자연이 물려준 그대로 포근하고 다정하다.
그 얼마나 따분하고 단조로운 삶일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아무 상관 없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니까. 내게는 이곳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고, 그 밖의 다른 곳은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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