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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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금붕어의 기억력은 3초라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금붕어 '이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단 3초의 시간동안 일생일대의 결정을 한다. '생각은 줄이고 행동하라'는 금붕어 철학에 따라, 있는 힘껏 어항 밖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떠오른 시간은 잠시뿐, 이언의 몸은 어느새 27층 아파트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작은 몸뚱이가 바닥에 닿기까지의 시간은 단 4초. 그러나 '세빌 온 록시' 같은 커다란 아파트에서는 4초 사이에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이언이 중력에 철저히 제 몸을 맡긴 채 추락하던 바로 그 시각, 누군가는 바람 피운 게 들통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누군가는 기나긴 은둔형 외톨이 생활 끝에 비자발적으로 사람을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며, 또 누군가는 생명 탄생의 순간을 뜻밖의 위기로 시작한다. '세빌 온 록시'에서는 매 초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고, 제멋대로의 이야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때로는 그 이야기 중 어느 하나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달려 다른 이야기의 발을 걸기도 한다. 혼자인 걸로 충분했는데, 사실 혼자여서 좋았는데, 필연적으로 함께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총 55장에 걸친 이야기가 단 4초만에 진행된다는 건 결코 흔치 않은 설정이다. 2장 '우리의 주인공 이언이 무시무시한 추락을 시작하다'부터 55장 '우리의 여정이 끝나고 세빌 온 록시의 좋은 거주민들에게 작별을 고하다'까지, 그 찰나의 순간에 '세빌 온 록시' 입주민들의 운명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운명이 다른 이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혼자 집에서 자연분만을 준비하던 피튜니아의 전화기가 하필이면 진통이 오는 순간에 방전되고, 도움을 청하러 나온 길에 운 나쁘게 문이 잠기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게 된 바로 그 순간 클레어는 견고하던 자기만의 세계 밖으로 발을 내디뎌야 하는 위기를 맞닥뜨린다. 음란전화 서비스로 생계를 꾸리며 조그마한 자기 아파트가 삶의 전부였던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며 문을 두드리는 만삭의 임산부는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다. 언제나와 같았던 어느 금요일, 가장 방심하고 있던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세빌 온 록시'의 주민들이 별나 보이긴 해도, 그들은 제각각 이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군상을 대표한다. 악질적인 바람둥이도,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은둔형 외톨이도, 트라우마로 인한 장애를 겪으며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도 생생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특정 인물을 틀에 맞춰 규정하지 않아도, 평범한 모습을 한 채 오가는 사람들 속에도 어딘가 이 책의 인물들과 닮은 구석이 한 부분씩은 녹아 있는 법이다. 서로를 무심히 스쳐가며 자기 삶에 몰두하기 바쁜 우리에게도,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곤 한다. 생판 모르던 남과 엮일 수밖에 없는 날, 살면서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일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는 날. 그런 날, 어쩌면 이 세계의 어디에선가 금붕어가 일생일대의 추락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순간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빌 온 록시'의 층계참에서 서로의 존재를 조금도 예견하지 못한 채 맞닥뜨린 사람들처럼, 우리의 삶에도 어느 순간 낯선 누군가가 뛰어들지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그토록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일 것이다. 지금껏 마음의 문을 걸어 닫고 꿋꿋하게 틀어박혀 있었어도 괜찮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며 조금쯤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에 묻어나는 무시와 천대에 상처받는 하루하루를 보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 눈 앞의 상황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다. 그 선택이 나를 결정하고 동시에 내가 속한 이 곳을 정의한다. 고층 아파트 '세빌 온 록시'가 눈 먼 욕심의 결정체인 바벨이 되지 않고 '좋은 거주민'들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순간 순간 그 곳 사람들이 했던 선택의 결과였다. 오늘 내가 가는 길에 갑작스레 뛰어든 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그게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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