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 생활문화사 세트 - 전4권 - 1950 ~ 1980년대 한국현대 생활문화사
김종엽 외 지음, 김종엽 외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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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한 지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따로 자격증 시험을 보지 않았으니, 그 이후 제대로 마음먹고 한국사를 파고들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상 앞에 앉아 역사라는 걸 공부했던 때를 떠올려본다. 역사가 공부할 수 있는 대상인가, 하고 떠오르는 의문은 잠깐 한 쪽으로 밀어놓는다.


온갖 인물의 이름을, 사건들과 그것들이 일어난 날짜를 외워야 했던 게 생각난다. 그래서 다들 국사를, 세계사를 암기과목이라 생각했었다. 이해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그저 되는대로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무슨 일을 했다더라, 하는 걸 열심히 구겨넣곤 했다. 그 단편적인 정보들은 시험을 치르는 순간까지 단기기억의 영역에 머무르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갔다.

배웠던 모든 과목 중에 역사가 제일 재밌었다는 엄마는 정규교육을 마친 지 마흔 해가 되도록 여전히 삼국시대 왕족의 계보를 깔끔하게 외우곤 했다.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엄마는 늘 대답했었다. 역사는 이야기잖아. 그런 이야기를 한번 듣고 어떻게 잊어? 그렇구나,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구나, 굵직굵직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쉴 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구나, 하는 걸 그때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이 책은, 그러니까 우리 엄마 같은 책이다. '정치적 격변과 세계사적 혼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온 우리들의 부모님, 삼촌·이모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책은 유명한 인물들이 앞장서서 역사를 바꿀 때 그 역사를 구성하는 매일매일을 살아냈던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그들은 독재자를 암살하지도, 새로운 법안을 상정하지도, 외교의 물꼬를 트지도 않았다. 자기 이름 붙인 발명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지금껏 읽히는 유명한 문학 작품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간 하루하루가 모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오늘을 있게 했다. 피엑스에서 흘러나와 도깨비시장에서 팔리던 미제 물건들을 사던 그들이, 계모임을 조직하고 때로는 곗돈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그들이, 전기구이 통닭을 먹다 처음 양념치킨을 사기로 결심했던 그들이 만든 역사가 분명 존재한다. 비록 그 가치만큼의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생각해본다. 미래의 아이들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때의 역사책에 대한민국의 21세기 초는 어떤 시기로 기록될까. 미래세대가 바라보는 지금의 대통령은 어떤 지도자일까. 4대강은 어떤 결론을 맞이할까. 어느 방향으로든 지금과는 달라졌을 그때의 세대는 지금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그러다 또 생각한다. 그들은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글을 끄적이는 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알았으면 좋겠다. 굳이 나를 알아줄 필요는 없다. 내가 20대였던 이 시대에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 목청껏 외치는 대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곤 했다고, 때로는 그게 서로를 헐뜯고 편협하게 편을 가르며 실제 세상보다 더 끔찍하게 변하는 난장판의 개싸움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거기에서 정말 가치있는 담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그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스캔들이 터지곤 했다고, 우리는 그 수작을 비웃으면서도 파파라치들이 잡아내는 누군가의 열애설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곤 했다고. 벚꽃축제가, 음악페스티벌이, 대형 스포츠 브랜드를 끼고 하는 마라톤 행사가 있었다고. 기계가 끊임없이 발전해서 때로는 어지러울 지경이었다고.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여 지금의 인간을 대체하지 않을까,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한번씩 억지로 삼키곤 했다고. 가족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졌다고, 그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고.

언젠가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90 ~ 2010 같은 시리즈도 나올런지.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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