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여자아이가 달린다. 가시덤불에 걸려 살갗이 찢어지면 비명을 지르면서도, 맨발이 아파 힘겨워하면서도 쉼없이 달린다. 멀리 집 한 채가, 그 집을 막 떠나려는 차 한 대가 보인다. 저 차를 잡아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여자아이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다. 차가 그냥 떠나는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러나 아이가 바닥에 널부러지는 순간, 속도를 올리던 차가 멈춰서고 노부인이 내려서 뛰어온다. 아이를 안아들고 황급히 남편을 부른다. 그리고 아이의 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이의 등에는 지옥이 새겨져 있다. 지옥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 고통을 동반했을 문신들이다.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또다른 곳에서는 한 여자가 비를 쫄딱 맞은 채 차를 운전한다. 오늘은 영 일진이 좋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쁨이 깃들어 있다. 내내 일하고 싶던 곳에서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 그 곳에는 여전히 식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는 옛 애인이 있다.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어떠한 가능성, 어떠한 희망이 있는 것만 같다. 드디어 도착한 새 직장은 생각만큼 친절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녀에게 그닥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 건 다름아닌 옛 애인의 입원 소식이다. 모두가 쉬쉬하는,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고만 얼버무리는 어떠한 이유로 중태에 빠졌다는 그 남자의 이야기가 그녀를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한다.


결국 그것은 같은 이야기


넬레 노이하우스를 필두로 한국에 연이어 소개된 독일 크리미(범죄물)의 특징은,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전개되는 것 같던 이야기들이 결국 어느 지점에서 서로 맞물려 하나가 된다는 데에 있다. 납치되었다가 1년만에 의문의 문신과 함께 다시 나타난 클라라, 연방범죄수사국에서 호흡을 맞추게 된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네메즈, 자비네의 옛 애인인 에릭, 그리고 클라라를 면담하게 된 검사 멜라니 디츠. 소설 초반 다양한 인물의 등장이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점차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면 그들이 각자 가고자 하는 길이 서로 교차하고 엉키며 하나의 진실로 향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독일 크리미의 매력이다. 엉망이 된 실타래처럼 보이던 어느 순간 뜻밖의 진실이 튀어나오는 것. 그렇게 끝을 알고 나면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것. 어느 날 숲속에서 나타난, 말을 하지 못하는 의문의 소녀를 통해 안드레아스 그루버는 또다시 한국의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깊숙이 끌어당긴다.


진실은 어디에


등에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묘사한 문신을 새긴 채 나타난 클라라. 그 이후 클라라가 발견된 빈 외곽의 숲에서 연이어 발견되는 등의 피부가 벗겨진 채 살해된 소녀들의 주검. 한편 뮌헨에서 독일 전역에 걸쳐 발생한 살인사건들이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임을 직감하고 수사를 시작하는 슈나이더와 자비네. 사건의 행적은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었을 때 23명의 피해자가 관련된 어마어마한 사건이 실체를 드러낸다. 그 너머의 진실을 보는 것은, 이제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창고 화재로 '지옥이 새겨진 소녀' 1쇄본이 대부분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한다. 아픔을 겪은 책인 만큼 결과는 더 좋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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