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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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그의 책은 전세계의 언어로 번역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가히 천재적인 소설가라 할 만하다. 그 남자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다. 잘생긴 외모에 달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어떤 의미있는 존재로 여기게 하는 분위기. 한때 그는 그 매력으로 여자들을 등쳐 먹으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갔다. 그 매력으로 처음 마르타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고,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도 자수성가한 인생이다.
한 여자가 있다. 진짜 천재는 이쪽이다. 그녀가 매일 밤 타자기로 찍어내는 이야기 속에는 사람을 매혹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녀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매력이 그 안에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매력을 세상과 공유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녀에게 글은 흘러나오는 것이다. 흘러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일 밤 타자기 앞에 앉아 종이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옮겨진 글은 그녀에게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지하실에서 천천히 썩어갈 뿐이다.
그 남자와 그 여자, 헨리와 마르타가 만났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깔끔하게 맞아 떨어졌다. 아내의 글을 가로채 자기가 쓴 것처럼 출판하는 남편이라니, 세상에 둘도 없는 개자식 같지만 사실상 그건 마르타가 원한 일이기도 하다. 마르타의 글로 헨리가 유명작가가 되어 돈방석에 앉는 건, 적어도 둘 사이에서는 반칙이 아니다. 둘은 잘 맞는 팀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헨리가 그렇게 손에 얻은 돈과 명예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건, 심지어 그렇게 만난 여자가 헨리의 아이를 임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헨리가 보낸 마르타의 소설을 처음 발견한 사람, 이후 헨리의 충실한 편집자가 되어준 사람, 때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마르타보다 더 헨리의 아내같이 보이던 사람, 베티가 임신했다. 자신의 삶의 근간을 흔드는 그 사건 앞에서, 헨리는 별안간 살인충동을 느낀다.


선택이 사람을 말한다


헨리는 원래부터 그닥 고상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밑바닥 인생 중에서는 잔챙이에 속했다. 여자와 원나잇을 즐기고 자잘한 금품을 털어 달아나는 게 고작이었던, 남에게 피해를 주긴 해도 그 정도가 몇 마디 욕을 해주고 나면 될 정도에 그쳤던. 그러나 평생 다시 없을 행운으로 손에 넣은 화려한 삶을 잃게 되는 위기의 순간에서, 헨리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표면으로 떠오른다. 밑바닥보다 더 깊은 무언가. 보통의 사람들은 평생 들여다보지 않고 살아가는, 아주 깊고 어두운 것. 그렇게 헨리는 베티를 없애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헨리의 인생에 행운이란 마르타와의 만남이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절벽에서 베티의 차를 자신의 차로 밀어 떨어뜨린 후 집에 돌아온 헨리는 얼마 후 초인종을 누르는 손님의 모습에 기겁한다. 거기에 바로 베티가 서 있다. 그리고 베티가 전하는 진실은 헨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마르타가 베티를 찾아갔다는 것. 베티의 차를 몰고 절벽으로 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차와 함께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건 베티가 아닌 마르타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에게 더 이상의 소설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헨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의 지금을 만드는 아주 큰 거짓말이 부서져 내리지 않도록, 영리하게 굴어야 한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진실은 자꾸만 수면 아래에서 찰랑인다. 그리고 헨리는 초조해진다. 초조함은 또다시 헨리의 내면 깊은 곳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헨리 하이든의 가장 큰 장점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결코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거짓말이 불러온 파멸, 그 끝에서 그는 과연 어디에 서있을지.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어떤 심연을 들여다보게 될지. 단순한 스릴러를 뛰어넘어 인간의 본성을 자문하게 하는 소설, '미스터 하이든'을 만나볼 시간이다.

썩어가는구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에서부터 밖으로 썩어가고 있어. 그래, 난 썩을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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