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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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크리스마스 아침, 네브라스카의 외딴 농장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다섯명 사망, 두명 중상. 사망자 중 한 명은 사건을 벌인 범인으로, 이 농장을 운영하는 그랜트 가의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가족에게, 그리고 가족처럼 지내던 일꾼들에게 총을 난사한 후 오랜 기간 농장을 위해 일해온 다른 일꾼의 총에 맞아 사망한, 18세의 에스라 그랜트. 대체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사건의 중심에 서는 것은 죽은 에스라가 아닌, 살아남은 그의 양동생 셰리든이다. 17세의 셰리든 그랜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아무도 모르게 집에서 달아난다. 그 전날 그녀는 여태껏 모두가 쉬쉬하던 가족의 비밀을 폭로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자신을 끔찍히도 구박하고 학대하던 양어머니 레이첼의 숨겨진 악행에 대해 낱낱이 털어놨다. 달아나는 건 오직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 다음날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이, 셰리든에게서 가장 좋아하던 오빠를 앗아간 끔찍한 사건이 되려 그녀를 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잡아끈다. 양어머니 레이첼은 전국구 방송에 등장하여 이 모든 건 양오빠들과 양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남자에게 꼬리를 치며 가정을 파탄낸 은혜를 모르는 양딸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끔찍한 사건의 충격 속에, 대중은 아들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외침에 설득당한다.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셰리든은 범인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폭력과 모욕 속에 농장으로 돌아온다. 그녀 앞에 놓인 세상은, 살아있는 지옥에 불과하다.

   그렇게 셰리든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건은 셰리든의 편이 되어준 오빠와 새언니, 능력 있는 형사 조던, 늘 그랜트 가의 비극을 똑똑히 지켜보던 메리제인 워커와 존 화이트호스, 그리고 셰리든에게 죄가 없음을 아는 페어필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차츰 해결의 기미를 보인다. 셰리든의 주변에는, 그녀를 사랑하고 지지하며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자극적인 언론 보도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미국 전역의 사람들에게 셰리든은 여전히 배은망덕한 창녀에 불과하다. 그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한다. 고작 열일곱에 셰리든은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 뉴욕에 가서 유명한 가수가 되기를 꿈꿨었는데, 이제는 농장을 벗어나는 일 자체가 두렵게 된 것이다.

   그래서 셰리든은 다시 도망친다. 외모를 바꾸고 죽은 엄마의 이름을 빌려쓰며, 새 인생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어린 여자애에게 주어지는 일은 뻔하다. 몸을 갉아먹는 막노동, 자존심을 팔아야 하는 서비스업. 사랑을 속삭이며 비싼 패물을 바치던 남자는 알고 보니 그녀를 고위층에 매춘부로 팔고자 하는 포주로 드러난다. 그렇게 페어필드를 떠난 후에도 셰리든은 자꾸만 넘어지고 부딪힌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메사추세츠 주 록브리지에서 폴 서튼을 만나 드디어 행복을 찾은 듯하지만, 어쩐지 그 결말이 석연치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독자들이 지금껏 셰리든의 불행을 뒤쫓아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에는 셰리든이 제대로 된 남자를 고른걸까. 자꾸만 의심이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끝나지 않는 여름'은 '여름을 삼킨 소녀'의 후속편이다. 네브레스카의 소녀 셰리든이 주인공인 두 권의 소설은, 산산이 부서지면서야 성장할 수 있는 아픈 사춘기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기에 때로는 공감이 가지 않아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책이다. 셰리든은 미숙하고, 성급하고, 다혈질이면서도 쉽게 상처받고, 애정에 목말라 누군가의 사람을 갈구한다. 그런 그녀의 선택은 때로는 바보같고, 그래서 한번씩 끝을 알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눈앞에 셰리든이 서 있다면 어깨를 흔들며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을 정도로, 이 소녀의 삶은 엉망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성장이 있다. 소녀는 자랄 것이다. 여름은 끝나지 않았지만, 마침내 가을이 오면 거기에 서 있는 건 달라진 모습의 누군가일 테니까.


넬레 여사의 판타지 월드


   넬레 노이하우스의 인기를 견인했던 타우누스 시리즈에 대해, 독일어 원본을 읽었던 아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형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멋지고 예쁜데다 능력 좋고 성격까지 쿨하다고. 이 정도면 스릴러가 아니라 판타지지, 하는 설명이 뒤따랐다. 정말로 그랬다. 넬레 여사에게는 특유의 판타지 월드가 존재했다. 로망이 실현되는 공간, 이 세상에 있을 것이라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실재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곳. 어쩌면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는지도 모른다.

   셰리든은 분명 로망의 집합체라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셰리든의 외로운 모험 외의 이야기를 담당하는 인물들은 멋지다. 조던 블라이스톤은 외모에 대한 묘사부터 전작의 멋진 형사들과 같은 라인을 이룬다. 게다가 비극적인 출생의 비밀과 동성애적 요소까지 합쳐지니, 정말 작가가 꿈꾸던 대로 빚어놓은 인물 같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조던이 자꾸만 이끌리고 마는 니컬러스 화이트호스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다. 게다가 전세계를 떠돌며 극한 직업을 전전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쿨함을 숨길 수 없다. 니컬러스의 어머니이자 아메리카 원주민인 메리제인은 또 어떤가. (아마도 작가 자신을 포함하는) 많은 유럽인이 상상하듯, 그녀에게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미래를 예견하는 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채는 통찰. 어쩌면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멋진 인물은 메리제인일지도 모른다.

   그 판타지는 푹 빠져들면 너무나 매혹적이다. 실제로 셰리든의 고행길에서 잔뜩 고구마를 먹다 보면 주변 인물들의 눈부심이 한번씩 사이다가 되어주는 듯하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그 모든 게 불편해지기도 한다. 정형화된 판타지는 때로는 편견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위 '꼰대' 같은 마음으로 보면 한번씩 덜걱거리는 요소가 있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흡입력 하나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게 '넬레 월드'의 전매특허 아닌가. 그래서 투덜대면서도 책을 덮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명대사를 만나보자

 

   "이해합니다, 그랜트 양. 이런 일을 마주하고도 부서지지 않는 게 운명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요."

   - 조던, p. 69


   "내가 여기 있으면 좋겠어?

   "그래."

   니컬러스가 대답했다.

   "그래, 당신이 머문다면 기쁘겠다."

   - 니컬러스, p. 372


   "당신 정체가 뭐야, 구루?"

   그는 뒤엉킨 생각과 감정을 통제할 수 없어서 농담처러 물었다.

   "형이상학적 관점에서는 '오래된 영혼'이지." 니컬러스가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 삶에서는 카우보이야. 이제 상당히 만족하는 삶을 사는 카우보이."

   "아, 그래? 왜 그렇지?"

   "드디어 도착했으니까."

   "어디에 도착했는데? 여기?" 혼란스러워진 조던이 물었다.

   "그래,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니컬러스는 재킷 주머니에서 손을 빼 조던의 어깨에 얹었다.

   "당신에게 도착했어. 아주 좋은 느낌이야."

   - 조던 & 니컬러스, p. 505



* 북로드 2016 스토리콜렉터스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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