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캘리포니아 S시의 새로 지은 쇼핑몰, 영화관 옆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햄버거 가게가 영 수상쩍다. 메뉴도 한 개 뿐인데다 탄산음료도 팔지 않고, 혼자 가게를 보는 흑인 점원은 어딘가 불퉁한 기색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가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이상한 물체다. 물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거대한 차통의 형상을 한 그것은 핵전쟁을 대비한 벙커 같기도 하고, 군사시설의 일부 같기도 하다. 수상쩍은 가게를 그냥 지나쳤으면 좋으련만, 우유부단한 성격의 일본인 에리오를 비롯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가게로 모여든다. 내내 한 명 이상의 손님이 동시에 있었던 적이 없는 이 가게에. 외모도, 국적도, 인종도, 성격도 가지각색인 손님들의 첫만남은 결코 원만하지 않다. 거친 말이 오가고 폭력을 휘두르기 직전까지 치닫기도 한다. 통하지 않는 언어의 힘을 빌려 서로에 대한 원색적인 편견을 드러내고, 초면에 그닥 싫을 이유도 없는 상대에 대해 적의를 불태운다. 그렇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한 공간에 머무르게 된 7명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건이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바로 대규모의 지진이다.

   지진 이후 깨어난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다른 사람으로 깨어났기 때문이다. CIA 요원들과 아크로이드 박사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이 '매스커레이드'라는 현상에 휘말렸음을 알게 된다. 그들이 지진을 피하기 위해 뛰어든 가게 한 구석의 수상한 벙커는 사실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인격 전이 현상을 일으키는 장치이고, 그 장치에 의해 그들은 평생 인격이 뒤바뀌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매스커레이드'가 얼마의 주기로 언제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순서만이 정해져 있다는 설명은 지진 그 자체보다 더 암담하다. 무엇보다 이런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예정이며 다시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그들은 절망한다. 이런 새로운 삶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스커레이드'. 함께 '체임버'에 들어간 사람들이 '스플릿 스크린'에 의해 인격이 나뉘고 나면, 일정한 순서로 계속해서 인격이 바뀌게 되는 현상이다. A에서 B로, B에서 C로, 순차적으로 인격이 이동하지만 이동하는 횟수와 주기는 인간의 힘을 벗어난다. 이 현상은 평생 지속되며, 만약 누군가 사망할 경우 그 육체와 함께 소멸되는 것은 그 순간 육체에 들어있던 인격이다. 즉, A의 몸과 B의 인격이 함께 죽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앞으로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할지 우왕좌왕하며 대립각을 세우기 바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살인이 일어난다. '매스커레이드'가 빠르게 반복되는 가운데, 누가 누군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은 죽어갈 뿐이다.


그 세계는 안전하다

 

   '인격전이의 살인'이라는 제목을 읽고 책 뒷면의 간단한 시놉시스를 훑었을 때 당장 나부터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인격이 자유롭게 뒤바뀌고, 그렇게 인격이 바뀌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진다니.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가려는 걸까, 싶은 불안감도 있었다. 그런데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작가였다. 소설은 SF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현실감을 제공했고, 덕분에 흠뻑 몰입하여 소설을 즐길 수 있었다.

   '아무리 비과학적인 현상이 일어나도 처음에 그 조건이 명확하게 독자 앞에 제시되어 있으면 그 범위에서 수수께끼는 풀리고, 독자는 공정한 정보에 기인하여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설에서 모리 히로시는 말한다. 그 말 그대로다. 형이상학적인 인격을 자유롭게 전이할 수 있는 장치는 아마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전반에 거쳐 작가가 극중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조목조목 설명하는 작품 속 세계는 흠 잡을 곳 없이 탄탄하고, 그래서 그 세계관을 흡수한 순간 이 소설은 반박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말이 안 되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세계 내에서는 모든 게 딱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격 전이의 살인'이 지닌 진정한 힘이자, 이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의 원동력이다.

   책 속에 친절하게 제시된 그림들을 지도 삼아 이야기를 따라가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미스터리의 진실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도 더 생생하게, 여기에는 어떤 논리적인 설명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게 참 놀라웠다.


미스터리 모아 로맨스

 

   눈 깜짝할 새에 습격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건 오로지 에리오와 애쉬블론드의 미녀 재클린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CIA는 새로운 조건을 제시한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며, 어느 순간 인격이 바뀌어도 들키지 않을 만큼 서로의 직업이나 언어, 생활습관 등에 대해 완벽히 익히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둘은 일본으로 돌아와, 늘 그렇듯 티격태격하면서도 누구보다 깊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타깝게 숨을 거둔 한 때의 동료들의 자취를 더듬다 알게 된다. 이 사건의 진범이 누구였는지를.

   미스터리답게 이 소설의 결말은 반전이다. 꼭 진범을 찾는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체임버'의 목적에 대해 아크로이드 박사와 진저가 오래 전 깨달은 사실을 공유하는 시점에서도 그렇다. 여전히 니시자와가 구축한 세계 내에서 삐걱대는 일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톱니바퀴 같은 결말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해당 인물이 범인이라는 사실에 완벽히 수긍하면서도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찜찜함이 남았다. 정말 그런 이유만으로, 누군가는 살인을 결심하게 되는 걸까.

   역자는 후기에서 자신에게 '인격전이의 살인'은 에리오와 재클린의 로맨스였다고 말한다. 책을 덮은 이후에 내가 느낀 기분도 그랬다. 정말로 상대방이 되어 살아보는 경험을 한 연인은, 서로를 얼마나 잘 알게 되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둘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극적으로 숨을 거두어야 했던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더 열심히.


* 북로드 2016 스토리콜렉터스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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