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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사랑
쯔유싱쩌우 지음, 이선영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낭만적인 사랑이 있어. 하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에도 보는 이를 눈물짓게 만드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상대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정작 본인은 잠을 못 이룰 만큼 고통스러워하는,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
작품의 시작에서 주인공 추우가 같은 회사 상사를 짝사랑하다 자살을 기도한 동생 추월에게 쏟아붓는 말이다. 대학시절부터 연애하다 결혼하여 8년을 함께한 끝에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제발 헤어져 달라고 무릎 꿇고 사정하던 전남편과 헤어진 이후로, 추우는 더 이상 두 사랑 모두를 믿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허황된 망상에 빠져있는 걸로만 보여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안쓰러워진다. 결국 보다 못해 추우가 직접 나서기로 마음 먹는다. 동생이 스스로 끊어내지 못하는 처절한 짝사랑의 고리를 끊고자, 그녀는 동생이 짝사랑하던 당사자인 본부장 임계정을 찾아간다. 동생을 회사에서 해고해달라고, 다시는 당신을 보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된다.
중국 굴지의 재벌가의 아들인 임계정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기업을 물려받는 태자 자리를 놓고 배다른 형제들과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놓여 있기는 해도 사실상 모든 걸 갖춘 완벽한 남자다. 수려한 외모에 집안 배경은 말할 것도 없는데다 돈도 많고 능력도 출중하다. 그를 좋아하다 못해 자살을 기도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고, 그가 온다는 날에는 온 여직원들이 옷을 차려입느라 난리가 난다. 추우는 그것이 못마땅하면서도, 곧 스스로도 그의 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만 추우의 눈에 비친 임계정은 다른 사람들이 본 것과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이상하게 자꾸 마주치는,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의외의 방식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임계정을 보며 그녀는 그의 맑은 눈빛이, 웃을 때 볼에 패이는 보조개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가 순탄한 것은 아니다. 임계정에게는 약혼녀가 있다. 임씨 집안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쥔 강씨 집안의 외동딸과 이미 결혼 날짜까지 받아둔 상태다. 추우의 주변에는 후회하며 돌아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사정하는 전남편과 오랜 기간 짝사랑했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매일 프로포즈를 해오는 절친한 친구가 맴돈다. 무엇보다 추우의 동생 추월이 여전히 임계정을 잊지 못해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만 해도 덜덜 떨며 시선을 내려깔기 바쁘다. 임계정이 추우와 연락하는 것만 알아도 둘이 무슨 사이냐고 살벌하게 묻는 동생 앞에서 추우는 한없이 막막해지고 만다. 그런 이유들로 두 사람은 시작 전부터 서로의 마음을 밀어내며, 서로에게서 도망치며, 각자의 감정을 아프게 삭일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에도 마찬가지이다. 대외적으로 두 사람이 사랑을 인정받을 방법은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서서히 파멸로 향해 간다.
중국에서 7년 동안 베스트셀러였다는 이 책은 제목처럼 제3의 사랑을 다룬다. 두 사람의 만남은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이 극적이지만 결코 브라운관 시청자들이 오그라드는 손발을 추스리며 보는 이야기들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홀로 짝사랑하며 괴로워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도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 혼자의 마음이라기엔 서로의 감정을 너무도 잘 알게 된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제3의 무언가가 되어 회색지대에 머무른다.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그렇다고 서로를 놓을 수도 없는 이야기는 중독성이 있어서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붙잡고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든다. 올해 송승헌, 유역비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다고 하니 영화로 만나보면 또다른 재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드라마처럼
책을 읽기 시작하고 처음 임계정에 관한 묘사에 맞닥뜨린 순간부터 '이거 되게 한국 드라마 같은 인물설정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초반부에 추우가 추월에게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다며 타박하는 묘사가 있어 혼자 한참 웃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부터는 어릴 적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인터넷 소설들이 자꾸만 떠올랐는데, 마지막 작가 후기를 보니 이 소설은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연재되며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 인터넷에 다음 편이 업로드되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중국의 독자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웃음이 났다.
'제3의 사랑'은 그렇게 드라마 같기도 하고, 인터넷 소설 같기도 한 작품이다. 아주 심오한 주제의식을 지니기보다는 감각적이고 즉흥적으로 누구나 한번쯤 상상할 법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재벌 2세 남자와 평범한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에서도 이미 한 차례 유행했었고, 그 여자가 이혼녀라는 추가 설정 역시 이제는 크게 새롭지 않은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제 3의 사랑'이 뻔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일단 재벌가의 사랑 이야기가 중국이라는 배경에 들어서니 스케일이 남다르다. 더불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추우의 털털하고 밝은 성격과 맞물려 한층 활기를 띄고 살아난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까지 덩달아 피식 웃게 되면서 위계정이 어째서 반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위계정은 멋진 남자다. 그를 둘러싼 설정들이 아무리 식상해도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는 가지 말라 하겠지, 여기선 백허그를 하겠네, 그렇게 예측을 하면서도 실제 그렇게 맞아떨어지면 멋있구만, 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 물론 로맨스에 약한 나는 그럴 때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책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말린 장미꽃 빛깔의 이야기
삶이란 결국 타인과 크고 작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놀이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p. 135
'사랑하는 사람에게 약을 사주며 그 사람에게 약을 먹으라고 명령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복 아닐까.'
- p. 167
"부 형, 완전 신세대시네요."
부 형은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원래 이런 것 마시지도 않았어요. 한 반년 되었나, 임 본부장님 따라서 매일 커피숍에 드나들며 마시다보니 이제는 맛을 알겠네요."
"오! 임 본부장님이 그런 취미가 있으세요?"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 사실 임계정에 대한 거라면 뭐든 궁금했다.
"네, 그것도 매일 아침 중산로에 있는 스타벅스만 다니세요."
"중산로 스타벅스요? 거긴 우리 사무소 맞은편인데?"
나는 조금 의아해했다.
"맞아요. 왜 그곳 커피숍만 가시는지 모르겠어요. 커피숍이라면 본부장님 사시는 곳에도 스타벅스가 있는데...... 어쨌든 출장이 없으신 날은 매일 아침 30분 정도 차를 몰아 중산로 스타벅스에 가세요. 대략 8시 30분에서 9시까지 계시다가 다시 차로 20분이나 걸려 회사로 출근하시죠. 아마 그 집 커피가 특별히 맛있나봐요. 그래서 저도 매일 따라 마시다보니 중독됐네요."
부 형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부 형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거기 앉아서 커피를 마시다보면 추 변호사님이 출근하시는 것도 보여요. 매일 9시 정도에 택시를 타고 오셔서 스타벅스 앞에서 내려, 길을 건너 사무실로 들어가시죠. 맞죠?"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p. 252
"불공평해."
"왜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기울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내 존재를 모를 때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했는데."
- p.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