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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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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록 속 스웨덴 여자


   모잠비크의 수도 마푸토에 보관되어 있던 식민시대의 여러 문서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스웨덴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매음굴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헨닝 망켈은 이 단순한 사실에 살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어 한나라는 인물을, 그리고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보냈던 짧지만 강렬한 몇 년을 창조해낸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불안한 낙원'이다.

   한나는 스웨덴의 산골짜기에서 매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집의 첫째로 자란다. 가난이 익숙하고 추위가 일상적인 그 곳에서,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도시로 보내겠다고 결정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모든 일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듯. 이따금 산골짜기를 지나던 부호 포르스만의 썰매에 올라 순드스발로 향한다. 그 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계획대로 친척을 만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포르스만의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며 새로운 인생을 얻는 듯했다. 친구가 있고, 익숙한 업무가 있고, 가끔씩 좋은 옷을 입고 시내에 나가 젊은 남자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웃어버릴 수 있는 일상을.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1904년 포르스만의 소개로 선상 요리사가 되어 로비사 호에 오르며 다시 한번 파도를 탄다. 한나를 어디로 떨어뜨릴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파도를.

   한나는 로비사 호에서 룬드마르크를 만나고, 한나 룬드마르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망인이 된다. 1935m의 깊이에 남편을 묻고 한나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부두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파라다이스 호텔에 숙박한다. 그녀의 인생을 다시금 되돌릴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갈 곳, 겉으로만 호텔로 치장한 아프리카 최고의 매음굴에서.

   그렇게 한나는 아프리카에 오고, 세뇨르 바즈와 그가 고용한 흑인 매춘부들을 알게 되고, 두번째 결혼을 하고, 로우렌소 마르케스에서도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저녁에 먹을 게 있을지 걱정했던 때에서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남아프리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재산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매음굴의 여주인이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한나는, 아니 이름을 바꾼 아나는 아프리카에서 흑인 여자를 위해 싸우는 첫 백인이 된다. 백인들의 비난과 흑인들의 침묵 속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양쪽에 한 발씩을 걸친 채 살아야 하는 삶. 그 삶에서 자유롭기 위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을 끝으로 한나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자유를 향한 여정


   그녀의 이야기는 그토록 단순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지만도 않다. 1904년에서 1905년까지 한나의 일기장을 통해 남아있는 기록은 한나가 살아간 하루하루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그녀의 내면에 일어났던 변화, 그녀가 느꼈던 감정, 그녀가 아프게 깨달았던 진실, 그리고 그녀가 관찰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술이다.

   처음 로우렌소 마르케스에 도착한 한나는 혼자다. 남편은 죽었고 배는 떠났으며 아프리카에는 아는 사람은 물론 제대로 말이 통하는 동향조차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아픈 그녀를 정성스레 돌보아주는 라우린다와 펠리시아는 고마운 은인이고 서투른 포르투갈어로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된다. 그러나 곧 매음굴의 주인인 세뇨르 바즈와 한나를 돌보도록 파견된 백인 간호사 아나 돌로레스는 한나에게 백인과 흑인의 차이를, 그 차이를 결정짓는 질서를, 그리고 그 질서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행동지침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벤치에서 잠든 흑인 노인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 자리에 앉는, 서슴없이 매음굴의 여자들을 때리는, 흑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증오와 냉소를 숨기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에게 한나는 처음에는 환멸을 느낀다. 흑인에 대한 비뚤린 시각과 이유 없는 증오를 이해하지 못해 당황한다. 그러다 곧 아프리카의 백인들을 점차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끔찍함에 몸서리친다. 어느새 자신 역시 흑인들에게,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잔인해지고 있음을 깨달으며 한나는 아프리카에 존재하는 질서가 부조리하고도 강력함을 몸소 체험한다.

   그러나 한나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 질서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흑인과 백인 모두를 바꾸기 위해 분투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함에도, 그래서 뼛속까지 외로움에도 한나는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한나는 베이라의 빈민들의 모습에서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을 본다. 매음굴의 흑인 매춘부들이 유산하거나 낙태한 아기들을 묻은 나무 아래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던 자신과 룬드마르크의 아이를 떠올린다. 백인 남편을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힌 이사벨을 보며 자신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에 그녀의 편에 설 수 밖에 없음을 직감한다. 그렇게 한나는 누구와도 다른 사람이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불안한 낙원'은 아프리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년 전 그 곳에서 일어났던 끔찍했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자, 지금도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사회질서로 굳어진 증오와 공포 앞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그 삶을 바꾸는 힘을 향한 간절한 응원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래서 글을 통해 아프리카의 고통을 고스란히 비춰내고자 했던 헨닝 망켈. 그가 전하고자 했던 건 광기 어린 피의 역사가 아닌, 마룻바닥 속 일기장처럼 고요히 묻혀 있던 희망이 아니었을까.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로우렌소 마르케스의 백인과 흑인은 서로 다르다. 백인들에게 흑인들은 주술적 사고에 사로잡힌 미개한 민족에 불과하고, 흑인들은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땅속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백인들이 허황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한나에게는 흑인들에 대해 이유 없는 미움과 분노를 내보이며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아나 돌로레스도 치가 떨릴 만큼 싫은 존재지만, 아무리 대화를 오래 지속해도 끝끝내 평행선을 유지하고야 마는 펠리시아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한나는 매음굴을 정리하며 매춘부들에게 5년 수입에 해당하는 넉넉한 금액을 보상하면 그들이 가족에게 돌아가 다른 삶을 꾸릴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 매춘부들은 그 돈을 받지 않겠으며 어디든 따라가 한나가 새로 여는 매음굴에서 몸을 팔겠다고 주장한다.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했던, 판이한 삶을 살아온 두 집단의 만남은 결코 쉽게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남긴다. 그리고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침묵이다. 때때로 침묵을 깨고 울리는 음성은, 온통 거짓을 말할 뿐이다.

   한나는 그 침묵이 두려움임을 알아차린다. 백인들도, 흑인들도, 온통 서로를 두려워한다. 낯선 존재를, 그 존재가 휘두르는, 혹은 휘두를지 모르는 낯선 종류의 폭력을. 유럽인들이 스스로 발견했다 의심치 않는 대륙, 그러나 그 이전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오랜 시간 살아오며 삶을 일궈왔던 대륙에 자리잡은 공포를 한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삶을,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었던 삶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쓴다. 로우렌소 마르케스를 떠나는 날까지 한나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한나는 자신과 그들의 간극이 영원히 매워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와는 조금 멀리 있는 너를, 그대로 알아주겠다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조화와 화합은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끝끝내 불가능한 순간도 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때로는 죽을 때까지 서로 다른 삶을 살기도 한다. 백 년 전 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그것을 잘못이라 낙인 찍고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하는 서로를 미워하고 또 두려워했다.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그 빈틈에 빠져 괴로워하던 한나는 떠나는 순간에는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한다. 그것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다르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서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에 남는 문장들

 

   그녀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세뇨르 바즈의 눈빛에서 발견한 두려움에 관해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두려움을 보지 못했었다. 스웨덴에도 물론 상류층이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여기는 모두가 두려워했다. 다만 백인들은 침착과 자기절제, 또는 사전 계획된 분노의 폭발 같은 가면 뒤에 두려움을 감출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왜 두렵지가 않지? 두려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일까? 완전히 혼자여서?

- pp. 160-161


   처음에는 한나도 흑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세뇨르 바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차츰 그 주장은 백인들에게도 인도인들에게도 아랍인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거짓말과 위선 위에 세워진 나라에 살고 있었다.

- p. 208


   "그런 건 걱정거리도 못돼요. 흑인들이 뭘 할 수 있어서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처음으로 그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 뭔데요?"

   "그들의 숫자요."

   그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한 눈치였다. 그녀가 뭔가 엄청난, 자신은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대답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아요." 그가 성급하게 말했다. "결코 현실이 되지 않을 악몽인 거죠.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저는 신경이 예민한 유형은 아니에요.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을 뿐이죠."

   "들리는게 뭔가요?"

   "침묵이에요. 부자연스러워요."

- p. 228


   열여섯쯤 되었을 소년은 문간에 멈춰 섰다. 숨을 죽인 모습이었다. 나랑 비슷하구나, 한나는 생각했다. 저 아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문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저 아이 속에서 내 모습이 보여.

- pp. 293-294


   나는 백인들이 스스로와 흑인들을 기만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하는 흑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은 백인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흑인들은 돌과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해. 반면에 흑인들은 어떻게 신의 아들을 모질게 학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백인들이 심장이 곧 멎어버릴 만큼 늘 바쁘게 움직이며 부와 권력을 향한 끝도 없는 추구에 휘둘리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해. 백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아. 대신 시간을, 언제나 부족하기만 한 시간을 사랑해.

- p. 403


   그 순간 아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목가적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건 불안한 낙원이었다.

- p. 407


   하지만 며칠 후 흑인 동네들을 되풀이하여 방문했을 때 그녀의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이 극빈자들에게서 삶에 대한 뜻밖의 갈망이 엿보인 것이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즐거움조차 하찮아하지 않고 두 팔을 벌려 움켜쥐었다. 나눌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도 서로 돕고자 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이 모든 빈곤과 불결의 표면을 파고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일기에 적어보려 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 불가해한 가난의 한가운데서 나는 풍요의 섬들을 볼 수 있다. 존재할 수 없었을 행복, 살아남을 수 없었을 온기. 이것을 통해 온갖 부와 안락에 파묻혀 사는 백인들의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을 나는 볼 수가 있다."

- p. 454


written by. 가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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