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읽기 힘든 곳이 몇 군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그랬다면, 나 역시 쓰기 힘든 곳이 몇 군데 있었다는 말을 꼭 해 두고 싶다. 스티븐 킹이 책의 닫는 글에서 처음 꺼내는 이 말대로, 책을 읽으며 더 이상 읽기 힘든 순간이 이따금씩 찾아왔다. 처음 책을 펼쳐든 건 시청에서 카메라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이었는데, 사람으로 가득 차 안 그래도 공기가 희박한 퇴근시간대의 버스에서 '1922'의 살인 장면 묘사를 읽다가 결국 멀미가 나서 덮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가 강간당하는 장면도,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계단에서 떨어져 널부러진 밥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도 한 줄 한 줄이 힘들었다. 역시 나는 스티븐 킹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다. 그럼에도 6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손에서 쉽게 놓지 못하고 며칠만에 다 읽었다.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불편하고 때로는 읽기에 괴롭지만, 그래도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다시 펴게 되는 것.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실린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다. 실존인물인 일명 'BTK 살인마' 데니스 레이더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는 이 이야기는 잔인한 연쇄살인범의 가까운 가족이 우연한 계기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하고, 사고하고, 또 행동하는지를 다룬다. 27년의 결혼생활 내내 큰 불화 한 번 겪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온 다아시는, 남편 밥이 출장으로 집을 비운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차고에서 남편이 살인마 '비디'라는 증거를 발견한다. 전화기 너머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아내가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걸 느낀 밥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고, 다시는 살인을 하지 않겠다며 아내에게 자신을, 그리고 아이들을 감싸주기를 부탁한다. 아이들을 평생 살인마의 자식으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모성,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도 모른 척한 공범으로 몰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 이제는 완벽하게 알게 된 줄 알았던 남편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숨어 있었다는 데에 대한 공포. 밥과의 결혼생활은 변하지 않지만, 다아시는 점차 어두운 세계에 침잠한다. 그리고 부업이자 취미로 화폐 수집을 하던 밥이 평생 찾아 헤매던 더블 다이를 우연히 손에 넣고 너무 기뻐 과음한 날, 다아시는 주저없이 남편을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남편의 입에 비닐봉지에 싼 수건을 밀어넣어 끝을 낸다. 그리고 경찰에 전화를 건다. 남편이 과음하고 계단에서 굴렀다고, 어쩐지 죽은 것 같다고, 서럽게 울면서.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매력은 순간 순간마다 다아시가 완벽하게 이해된다는 점이다. 남편 밥이 10명이 넘는 여성과 어린이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인물임을 알고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 것도, 그런 남편과의 계속되는 생활 속에서 점차 메말라가는 것도, 결국에는 자신의 손으로 종지부를 찍는 것도 모두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모습들이다. 실제 살인범들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은 남편의, 아들의, 오빠의, 아버지의 범행을 처음 안 게 언제였을까, 그 순간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야기의 끝에서 많은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남아있는 것도 좋았다. 잠깐 영화 '영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영도보다 다아시가 훨씬 건강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나의 영혼을 갉아먹은 것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1922'는 잔인한 살인 묘사로 책을 읽는 데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던 문제의 작품이었다. 전반에 걸쳐 끔찍한 묘사가 가장 많은 작품이기도 했다. 땅 때문에 아들을 꼬드겨 함께 아내를 살해한 윌프레드의 인생을 그 비참한 최후까지 추적하는, 윌프레드 본인이 쓰는 자기고백 형식의 소설. 사실 작품을 읽으며 몇 번이나 어깨를 움츠려야 했던 것에 비해서 다 읽은 후에는 개운한 기분이 들었는데,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가 권선징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결국 윌프레드를 괴롭히고, 공포에 떨게 하고, 종국에는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그 자신이 저지른 죄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덧붙여진 신문기사 형식의 짤막한 글을 읽고 과연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현실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쥐는 실제로 있었을까.


빅 드라이버를 쫓다

 

   가장 마음 아프게 읽었던 작품은 '빅 드라이버'였다. 어느 날 작은 북클럽의 모임에 강연 연사로 초청을 받은 30대 여류작가 테스는 그 곳의 도서관 사서 라모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을 추천받는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그 길에는 못이 박힌 목재가 굴러다니고, 결국 그녀의 차는 펑크가 나고 만다. 그리고 같은 길에 들어선 '트럭을 입고 다니는 듯한' 거구의 남자는 타이어를 갈아주겠다며 선뜻 도움의 손을 내민다. 그러나 테스가 남자의 트럭 뒷좌석을 흘낏 본 순간 거기에는 길에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목재가 널부러져 있고, 테스에게 다가온 남자는 주먹을 날린 뒤 그녀를 근처의 버려진 상점으로 끌고 가 강간한다. 그리고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테스를 다른 시체 두 구가 썩어가는 배수로에 버린 뒤 유유히 사라진다. 그 배수로에서 살아 돌아온 테스는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스스로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그 복수에 성공한다. 라모나와 그 두 아들을 죽인 이후의 삶이 행복할 지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모든 이야기를 벳시에게 털어놓고 걸어가는 테스의 뒷모습은 더 이상 겁에 질려 있지 않다.

   어쩐지 강간을 다룬 작품은 유난히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특히 이 이야기는 사건이 있은 후 며칠에 걸친 테스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더욱 그렇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고도 어쩐지 자꾸만 움츠러들고 세상 앞에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피해자의 심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테스의 복수가 옳았는지는 다른 문제이지만, '저들을 경찰에 신고해서 내가 얻는 게 뭔데?'를 끊임없이 묻는 그녀의 마음만큼은 정당하지 않을까.


언제나 대가는 존재한다

 

   네이버 웹툰 중 배진수 작가의 '금요일'이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사실 가장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기는 작품이기도 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말기암 선고를 받고 모든 희망을 잃은 한 남자 앞에 한산한 도로 옆에 좌판을 차린 노점상이 눈에 들어온다. 연장(extension)을 판다는 노점상을 정신병자 취급하던 남자는, 그의 생명을 연장해줄 수 있다는 말에 장난처럼 응한다. 당신 몸 속의 그 덩어리는 그냥 없애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옮겨주게 되어 있다고 설명하며 싫어하는 사람을 말해보라는 노점상에게 남자는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댄다. 늘 자신보다 잘났던, 그래서 끊임없이 열등감을 안겨주었던 친구의 이름을. 그 일이 있고 남자의 암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행복한 가정에 부유한 사업을 운영하던 남자의 친구는 연속된 불행으로 점차 모든 것을 잃어간다. 그의 아내는 암으로 죽고, 딸은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아이마저 사산하고, 첫째 아들은 심장마비로 영구적인 정신지체를 얻고, 막내아들은 아내를 폭행하여 감옥에 갇힌다. 회계사의 횡령으로 회사는 부도가 나고, 친구는 아이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사고로 위장한 자살을 택할 생각을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 거래의 대가는 매년 연 수입의 15%를 주는 것이었다. 남자는 기꺼이 그 돈을 보낸다. 그러나 진짜 대가는 친구의 인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고작 암이 낫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 집안의 끔찍한 불행. 남자는 처음 거래를 할 때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게 이런건가? 하고 농담조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친구의 거듭된 불행에 속으로 즐거워하며 더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남자는, 이미 악마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거래는 늘 공정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