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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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노가 위트와 만나는 순간

내가 놈베코였으면 아마 진짜 테러리스트가 됐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아직 평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때에 남아공에서, 그것도 그 중에서도 소웨토에서 태어난 놈베코는 인생의 첫장을 부조리와 냉대, 방임과 착취, 그리고 끔찍한 가난 속에서 보낸다. 그 시간 속에서 어린 여자아이는 타고난 두뇌와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직관력, 그리고 선천적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는 지혜로 삶을 개척해나간다. 그러나 놈베코에게 주어진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조금 편해질 만하면 사고가 터지는 나날의 연속이다. 드디어 소웨토를 벗어났나 싶더니 만취 상태의 엔지니어가 모는 차에 치이고, 그 엔지니어의 연구소에서 보낸 감금생활을 청산하는가 싶더니 스웨덴까지 핵폭탄이 따라온다. 핵폭탄의 안전한 처리를 위해 함께 노력해주는 똑똑하고 다정한 운명의 남자를 만나 이제 좀 행복해지려나 싶었는데, 그 남자에게는 분노유발자들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쌍둥이 형제와 그 여자친구가 딸려있다. 그리고 그 이후 놈베코와 그녀의 남자친구 홀예르2가 폭탄에서 벗어날 기회를 손에 쥘 때마다, 홀예르1과 셀레스티네, 그리고 그 외의 예측불허의 인물들은 둘의 삶에 말 그대로 똥을 끼얹는다. 결국 40세가 넘은 나이에 드디어 폭탄을 없애고 `존재할 수 있게` 되어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때까지, 놈베코의 삶은 고단하다 못해 기구하다.

2. 허구의, 그리고 현실의 분노유발자들

500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는데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분노 때문이었다. 정말 화가 나서 책을 덮고 혼자 분을 삭여야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놈베코가 지켜온 전재산이 불에 타는 동안 블롬그렌 노인이 물값은 누가 줄거냐고 따지며 불을 끄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홀예르2가 그토록 열심히 준비한 논문심사에 쌍둥이인 홀예르1이 나타나 온갖 반군주제적 발언을 늘어놓은 탓에 논문이 일방적으로 취소되었을 때, 정계에서 호평받는 잡지를 발간하여 드디어 스웨덴 수상과 만날 기회를 얻었나 했는데 홀예르1과 셀레스티네가 국왕을 모욕하는 사설을 실어 인터뷰를 취소당했을 때. 그때마다 혼자 머리를 부여잡으며 책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읽었던 건 그런 분노의 결정체들을 작가가 위트로 포장하여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500 페이지 내내 사고만 치는 홀예르1과 셀레스티네를 끝까지 두고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의 그 말도 안되는 행동에 결국은 어이가 없어서라도 사람을 웃게 하는 면모가 있었던 점이었다. 객관적으로 나열하면 더럽게 운이 없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놈베코의 일생이 하나의 훌륭한 소설로 탄생하게 된 건 순전히 작가의 글솜씨 덕이다. 요나스 요나손이라는 작가가 그냥 반짝 인기를 얻은건가 싶었는데,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싶다.

이 책의 또다른 매력포인트는 현실과 허구를 섬세하게 잇는 데에 있다. 놈베코와 홀예르 & 홀예르, 셀레스티네, 중국 세 자매와 예르트루드 등은 분명 허구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폭탄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은 실존인물이다. 놈베코가 남아공에서 만났던 `중국 선생님`에서 어느 날 중국 국가주석이 되어 놈베코의 폭탄처리에 지대한 도움을 주는 후진타오, 아파르트헤이트의 절정기에 있던 남아공에서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보타, 스웨덴에서 현재에도 총리직에 있는 레인펠트까지. 그리고 그들의 캐릭터는 팩트에 과하지 않은 문학적 상상력을 보태서 완전한 허구의 인물들만큼이나 다채롭고 매력적이다.

앞서 홀예르1과 셀레스티네가, 블롬그렌 부부가 얼마나 홧병을 일으키는 인물들인지 간략하게나마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비해 소설에 등장하는 현실의 정치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물론 그들도 크고 작은 소동에 관여하지만, 절대적인 존재감은 중심 등장인물들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치인들이 특권의식과 차별주의를 버리고 보다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세웠다면, 어린 놈베코가 똥통을 나르며 유년기를 보내지는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남아공의 법 체제가 좀 더 깨끗하고 올곧게 유지되었다면, 놈베코가 판 데르 베스타위전의 차에 치였을 때 하녀로 끌려가는 대신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자유를 얻지 않았을까? 스웨덴의 왕실과 수상관저에서 몇 차례나 폭탄의 존재를 알리고 협력하기를 원한 놈베코와 홀예르를 시덥잖은 사람들로 치부하고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삶은 훨씬 일찍 평탄해지지 않았을까?

허구의 분노유발자들은 작가의 위트로 용서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의 분노유발자들은 어떨까?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일부는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 나머지 일부도 그닥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의 일상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평범한 개인들의 인생여정에 때로는 티가 나지 않을만큼 에둘러서, 그리고 때로는 너무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재계 인사들은 이 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때로는 우리도 그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그들이 만들어 둔 시스템 앞에서 절망하기도 하고, 그들의 안일한 결정에 피해를 떠안아야 하는 처지에 격분하기도 한다. 그런 순간들이 닥쳤을 때, 홀예르1과 셀레스티네처럼 거리로 뛰쳐나가 국왕 타도와 아나키즘을 외치며 정면돌파를 시도할지, 놈베코와 홀예르2처럼 수십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다가올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지는 개인이 선택할 몫이다. 그저 하나, 작가가 주는 메시지는 그런 순간에 - 아주 어렵더라도 - 유머와 위트로 고개를 돌려보자는 것. 이 책을 다 읽은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이거였다.

"인간을 알면 알수록, 난 더욱 개들을 사랑하게 된다." - 마담 드 스타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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