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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굽는 시간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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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마을' 얼마전 길을 가다 우연히 본 제과점 이름이다. 체리색 나무간판 아래로 소담스런 바구니에 윤기가 흐르는 빵들이 소담히 담겨있고 노을빛이 나는 꼬마전구가 별처럼 촘촘히 천장에 박혀있는 아담한 빵집이었다.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들어가는 과자로 만든 집이 연상되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의 느낌이 입안에 사르르 침을 돌게 만들어 혼자 미소를 지으며 지나친 적이 있다.

<식빵굽는 시간>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생각했던 것은 '빵굽는 마을'의 빵의 이미지였다. 이 책은 아마 아기자기한 연애이야기 이거나 주부의 그렇고 그런 일상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볍게 읽어버리고 말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살까말까 망설이며 마티스의 '푸른 나부(裸婦)'가 그려져 있는 겉표지를 넘겼다. 조경란, 1969년 서울생, 이라는 설명과 함께 긴 단발머리를 앞가르마로 내린 채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이 보였다. 우울해 보이면서도 많은 고통을 겪고 난 사람의 비어있는 다소 공허해 보이는 눈빛, 그 눈빛을 보고 난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식빵굽는 시간>의 '식빵'은 적어도 '빵굽는 마을'의 '빵' 그 이상의 무엇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제 곧 서른 살이 될 거야……'주인공 한여진의 우울한 읊조림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그녀는 삶의 아무런 애착이 없다. 조금씩 죽어 가는 엄마를 보고서도, 엄마의 발병(發病)이후로 엄마 외의 존재에게 전혀 무관심한 아버지에게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정서를 가진' 이모에게도 아무런 애정을 못 느낀다. 낯선 타인처럼 무관심하고 못견뎌한다. 그녀가 오직 소통을 원하는 존재는 단 한 사람,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한익주이다. 그는 여진의 또 다른 자아이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그를 향해, 그와 반대로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려 절규하는 여진은, 혼잣말을 한다. '나는 너라니까. 그러니까 너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지 마. 나는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든지.' 라고 말이다.

자신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들을 위해 그녀는 빵을 만들고 빵을 건넨다. 그녀에게 빵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媒介)이다. 하지만 그녀의 빵은 번번히 거절당한다. 한익진의 애인인 한영원에게, 촉촉하고 부드러운 프랑스 빵인 브리오슈를 건네지만 차갑게 거절당한다. '미안해요. 나는 빵을 좋아하지 않아요. 구태여 이걸 가져가고 싶지도 않구요'라고 말하는 한영원에게 여진은 대답한다. '상관없어요.....정말 상관없어요'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 빵을 지하도 바닥에서 신문을 팔고 있는 노파에게 슬며시 내려놓고 도망간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크루와상을 만들어주고 싶어할때는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고 곁에 없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빵을 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고 봉지를 툭 쳐버린다. 그 바람에 바닥으로 쏟아진 빵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여진은 실연(失戀)의 느낌으로 빗물에 젖어 흐물거리는 빵을 천천히 짓밟는다. 거절당할 것을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오랜 습관처럼 말이다.

엄마의 죽음에 이어 아버지가 자살하고 이모는 자신이 여진의 생모(生母)임을 알린다. 별 충격도 없이 여진은 다만 자신이 떠날 때임을 예감한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과거의 존재들로부터 말이다. 그녀는 이모에게 줄 빵에 수면제를 잔뜩 섞는다. 정신적 살해. 살해하려고 한 건 이모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일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자아인 한익주에게서도 자유로워진다. 자신과 소통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모두 떠나보낸 후 그녀는 '강여진 베이커리'라는 빵집이름을 짓는다. 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녀는 '나무들의 수많은 이파리 사이로 차츰 푸르게 번져들고 있는 세상을 빛'을 보며 그녀의 주방으로 걸어간다. 이제 오로지 자신을 위한 식빵을 만들기 위해서. 세상과의 온전한 소통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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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원성 스님 지음 / 이레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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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가 있다. 박하사탕. 동화같은 제목과 달리 영화는 주인공이 기찻길에 서서 '되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하며 기차속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감독의 창작동기를 들은 적이 있다.평상시와 다름없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 문득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같은 존재라 믿기 어려운, 초췌한 사십대 남자의 초점 없는 눈동자와 축처진 희멀건 얼굴이 보였다.

어, 저게 누구지? 저게 내 모습이야? 아닌 것 같은 데……왜 내 모습이 이렇게 되었지? 눈빛은 왜 이렇게 공허해졌지? 세상을 다 살아버린 노파같은 표정은 어떻고……원래의 내 모습은 어디로 간 거야? 어떤 시간들을 지내왔기에 지금 내 모습이 이렇게 된거냐구? 그동안 나의 시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흘러갔단 거야? 도대체 원래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거야...

세면대 위의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한참 하다가 박하사탕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장실 '거울' 속에서 박하사탕이 탄생한 셈이다. 어디 이창동감독 뿐이겠는가. '거울'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만나게 하고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지 않았는가.

이 책 '거울'을 쓴 원성스님도 자신의 책을 보면 자신의 참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딴 생각 속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참모습으로 다시금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는 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란다. 스님은 자신의 책 '거울'을 통해 속세에 사는 욕심 많고 일상에 갇혀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나같은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거울'을 들여다 보라고 말한다.

원성스님의 그림에는 '호기심과 모험심, 그 싱싱한 생기'가 잔뜩 묻어나는 동자승이 늘 보인다. 어떻게 보면 원성스님의 얼굴같기도 한 동자승들의 해맑은 눈빛과 홍조를 띤 부드러운 볼을 보면, 지리산 깊은 계곡물속으로 투명하게 보이는, 송사리의 몸짓마저 부드럽게 미끄러질 것 같이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생각난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게 닮은 점이다. '거울'처럼 말이다.

내겐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이 많건 적건 출입문 옆에 기대어서는 버릇이 있다. 안으로 잘못 들어갔다가는 앞사람의 뒤통수에 코를 붙이게 되거나 빼곡이 둘러싸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달리 둘 데가 없어 신발 앞꿈치만 쳐다보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출입문쪽을 바라보며 서게 되면 어느새 출입문 유리가 검은 거울이 되어 나의 모습을 비춰준다. 여태 아무 생각 없이 피로에 지친 내 모습만 멀뚱히 쳐다보며 다녔는데 내일 아침엔 나도 원성스님처럼 대화를 한번 해볼 작정이다. 거울 너머의 나와, 그 거울을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말이다.

'너는 뭐니?/ 나는 너./ 너는 뭐하니?/ 널 보고 있지./ 왜 날 보고 있지?/ 난 널 보고 있어야만 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진정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시야에서 너를 놓칠 수 없어' (원성스님의 詩 '거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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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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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표지에 있는 카프카의 얼굴을 본다.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검푸른 눈, 소년의 호기심과 건장한 젊은이의 절망이 묘하게 섞여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표정이 자꾸 눈을 잡는다. 설명을 보니 카프카의 결핵말기 사진이었다. 죽기 얼마 전의 표정이라고 하니 자못 비장해진다. 누구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의문은 금방 풀린다. 헤르만 카프카, 카프카의 아버지이다. 평생 카프가가 살아야했던 감옥, 카프카의 자학과 자괴감의 원천이자 글쓰기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 바로 그의 아버지이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자립성을 획득하고 도피를 시도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성과는 무척 형편없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읽는 그의 소설들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탈주하려고 시도한 고통의 몸부림이며 절규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다. 끝내 아버지의 감옥 속에서 눈을 감고 만다.'어린아이의 능력을 가진 어른'. 카프카는 자신을 이렇게 인식하며 수치심과 역겨움, 무력감과 죄책감에서 평생을 고통받는다. 단편 『판결』에서의 게오르규는 어떤가? 아버지의 조롱에 대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판결대로 강에 빠져 죽는 주인공 게오르규의 모습은 바로 카프카 자신일 것이다. 판결! 판결이라니,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

카프카는 '거대한 몸집의 남자,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심판자'로 자신의 아버지를 인식한다. 그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었다. 자신이 노예상태로 사는 세계,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사는 세계,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 세계 사이에서 카프카는 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그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여러 번에 약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는 카프카, 그는 아버지와 대등한 자격을 얻게 되는 일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최종결론안'은 확실하게 하나이다. 그건 바로 '체념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바람처럼 카프카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살다가 한결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을까? 글쓰기가 아버지의 감옥에서 탈주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카프카 검푸른 눈망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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