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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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다. 세수를 하고 나와 스킨로션을 바르지 않았을때 보다 더 건조하고, 아주 바삭하게 말라버린 나뭇잎처럼 건조하다. 눈도, 비도 잘 오지 않는 북경의 날씨처럼 건조하고 또 건조하다. 

 

갈라진 거북이 등껍질에서도, 끝도 없는 가뭄에 쩍- 갈라져버린 땅에서도, 새살이 돋고, 새싹이 나듯. 갈라져 버린 내 마음에서도 어떤 희망을 볼 수는 있는걸까?! 풍선을 후후.하고 불어보면 정말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혼자서 풍선을 후후.하고 불어보기보다는 닥터 현 같은 사람을 만나 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고 싶다. 가령, 토끼얘기.같은... 그리고 닥터 현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도 싶다. 누구나 저마다 이야기 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또, 가끔은 돌아가는 세탁기 위에서 소리나지 않게 울어도 좋을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려 마작을 해도 좋겠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보이지 않는 어느 경계선 즈음에서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모두들 너무나 비슷비슷하게 여겨진다. 어쩌면 문체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이 주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동유럽의 겨울같은 느낌이다. 각 단편속의 주인공들은 모두들 어딘지 모르게 건조한 맛이 있고, 어딘지 모르게 세상과 융합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활기나 열정같은건 찾을 수 없다. 남편을 찾아다니는 여자에게도, 고모를 떠나보낸 총각에게도, 풍선을 후후 불어보는 J에게도. 그렇지만 달팽이의 산란처럼 아주 미세하게나마 어떤 새로운 시작. 여기가 끝이 아님. 이제는 희망. 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 미세한 희망의 빛이 내게로 조금씩 다가오길 바래본다.

 

 

 


 

"자루를 짊어지고 있다면, 홀가분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선생님."

"무슨 말이에요, 이작가?"

"왜 이일을 그만두시려고 하는데요?"

"뭐, 설명하기가 쉽진 않군요."

"저는 삼 개월 동안이나 그 설명하기 쉽지 않은 얘기들을 했어요."

이제 선생님 차례예요.

"권태스러운가요?"

"조금은."

"불안하기도 하죠?"

"뭐, 조금은."

"위기에 빠진 느낌이 들 때가 있죠?"

"상담자로서 내가 적절한 사람인가, 생각하고 있다고 할까. 꽤 오랫동안."

"버려야 할 패. 제가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요?"

"글쎄, 난 마작 같은 건 못 둔다니까."

"토끼 말예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버려야 할 패가 있는 거라구요."

"이젠 더 이상 토끼 핑계는 안 댈 것 같군."

"제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

"제가 왜 여기 다시 오게 된 줄 아세요 선생님?"

"변덕스러우니까 그렇지."

"제가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했었잖아요."

"벌써 오래된 일처럼 말하는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말이에요."

"그랬죠."

"그런데 위기에 빠졌다고 느낀 순간, 무력감과 권태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걸 느꼈어요."

"흠, 어째서요?"

"저 자신한테 질문을 했죠."

"어떤?"

"그렇다면 나의 무력감과 권태는 목적의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온 것일까?"

"아무튼 작가들이란."

"아이러니컬하게도 위기에 빠지자 나를 보존하고 나를 지켜야겠다는 절박함을 다시 느끼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이 작가의 새로운 목적의식이 됐다는 말이로군."

"그렇죠."

"......"

"선생님이 가진 무력감과 권태는,"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인가?"

"그게 사라졌다면 이젠 자신에게 위기 같은 거 느끼시겠네요?"

"좀 쉴까 해서. 이작가 치료도 거의 끝난 것 같고."

"그렇다면 이제 위기에 빠진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겠네요?"

"글쎄."

"그런 걸 우리가 시장 같은 데 가서 살 수는 없는 거겠죠?"

"그거 내가 이작가한테 한 말 같은데."

"잘 기억하고 계시면서."

 

- 마흔에 대한 추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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