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롭, 드롭, 드롭
설재인 지음 / 슬로우리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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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부드러워야 했다.



▶ 우정, 사랑, 연대의 시작과 끝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생긴 이후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이 말이 어떤 의도로 도대체 왜 만들어졌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크게 동의하지 않는 바다. 어쩌다 보니 일명 ‘여초’라 불리는 곳에서 일을 했지만, 나의 적은 여자가 아니었다. 나의 적은 게으르고 무능력한 상사, 이간질하기 좋아하던 후배, 호시탐탐 남의 아이디어를 노리던 동기였다(굳이 성별을 따지자면 아주 높은 비율로 남자가 더 많다). 즉, 나에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보다 ‘여자를 돕는 건 여자’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드롭, 드롭, 드롭》은 약자들의 우정과 사랑,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슬프게도 ‘약자’들은 대부분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로 시작한 글은 누군가와 ‘함께’로 막을 내린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구원하는 쌍방 구원 서사는 마음을 몽글거리게도 뭉클거리게도 아리게도 응원하게도 만든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강렬한 이야기. 그게 바로 《드롭, 드롭, 드롭》이다.




▶ 지독한 현실에 더해진 SF 한 스푼!

책에 실린 네 편의 단편은 모두 다른 색,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잔인할 정도로 지독한 현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주인공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 약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잔혹한 현실을 만드는 가해자들이 하나같이 뻔뻔하고 사실적이어서 잠시나마 피해자가 된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가정폭력을 당하고, 지방에 산다고 수도권 거주자에게 무시당하고, 실험 대상이 되고, 제때에 물건 배송을 받지 못하고. 이런 불합리한 상황들만 계속해서 이어지면 호박고구마 100개를 한 번에 먹은 것같이 답답한 기분만 들 텐데, 여기에 SF 한 스푼이 곁들여진다. 이 SF 요소가 책의 맛을 단숨에 끌어올린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가 한 달 뒤 지구의 운영을 종료할 거라고 선언하기도 하고, 또 어디서는 어른이 아이로, 아이가 어른으로 바뀌며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기도 한다. 신선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한 SF적 상상은 우리를 책에 몰두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 지긋지긋한 현실과 재치 있는 상상의 절묘한 조합과 작가의 뛰어난 강약 조절 스킬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술술 읽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고 쉬운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만큼은 묵직하다. 결국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폭력과 차별, 배척이 아닌 따스한 온기와 다정한 믿음, 편견 없는 관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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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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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

아마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고 편한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집’을 이야기할 거다. 온갖 종류의 긴장을 풀고 온전한 ‘나’로 지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혹은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폐가’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주인에게 버림받아 낡고 허름해졌을 뿐인데, 우리는 그 안에서 짙은 공포감을 느낀다. 거기에 ‘귀신이 산다’는 말까지 덧붙여지면- 그곳은 유명해지고 싶은 이들의 성지가 된다.


책에 등장하는 적산가옥은 폐가가 아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을 탔고, 이제는 누군가의 관리를 받는 그저 낡은 집이다. 그런데, 거기서 느껴지는 중압감과 공포감이 남다르다. 그 공포감은 순식간에 안으로 파고들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갉작거린다. 아프지 않게. 은은하게.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 나이와 신분, 삶을 뛰어넘는 우정

주인공인 운주는 꿈을 통해 외증조모의 과거를 들여다본다. 가난에 쫓겨 간호사가 되었고,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던 그녀의 과거가 지나치게 생생하다. 그리고 마침내 외증조모가 일본인의 집이었던 적산가옥에 들어갔을 때, 영원히 과제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던 수수께끼들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한다.


처음, 외증조모가 고용인의 아들이자 간병 대상인 유타카에게 느낀 감정은 못마땅함과 혐오, 경멸에 가깝다. 그러나 별채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둘 사이에 묘한 우정이 자리한다. 건조하고 푸석하지만 적당한 온기를 가진 투박한 ‘우정’은 둘을 지옥과도 같은 ‘적산가옥’에서 버티게 만든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주는데, 힘없는 자들의 연대가 너무 하잘것없어서 더욱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소설을 읽을 때마다 찾아오는 내 ‘고질병’이 도지고 만다. 바로바로 등장인물 ‘행복바라기병’. 소설의 개연성이고 뭐고 다(착하고 좋은 등장인물만) 행복하게 해줬으면 하는 답도 없는 병이다. 여기서도 몇 번이고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바람의 끝은…….



▶ 《적산가옥의 유령》은 따뜻한 봄날, 지하 5층 정도 되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위로 올라가면 따뜻한 공기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망적인 기분이 들지 않게 하면서도, 공포감을 유지하기 딱 맞은 온도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주인공인 ‘나’ 현운주가 기존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흔한 캐릭터라는 것. 평범한 인간이 느끼는 리얼한 공포를 전달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라면 존중하나, 다부지고 똑부러진 현운주 버전의 이야기도 왠지 궁금하다. 정독해서 읽는 게 느린 편인 나도 2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가독성이 좋고 훌륭한 책이다. 더운 날,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을 찾는다면 추천!


▶ 같이 땅콩빵 사러 갈 파티원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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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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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문명)’을 안다는 착각

사전에 따르면 ‘서양’은 유럽과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해에 걸쳐 받은 주입식 교육 덕분에 ‘서양’이라고 하면 자동 반사적으로 ‘민주주의’, ‘평등’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고는 한다. 물론 ‘인종차별’과도 같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대체로 긍정적 혹은 중립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만 같던 그들의 ‘서양 문명’이 선형적으로 계승되어 온 것이 아니란다. 거기에 더해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이념적 유용성을 가지고 있어 발명되고 보급되고 지속되었단다. 결국,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서양은, 서양 문명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교묘하게 편집되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고전 고고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니샤 맥 스위니는 《만들어진 서양》을 통해 서양의 기원을 검증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거대 서사로 발전해 간 과정을 추적한다. 어려운 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를 가진 14명의 인물을 통해 더 쉽고 흥미롭게 말이다.



▶ 진짜 서양사의 민낯을 보여주는 인물들

그동안 인물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들은 많았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만들어낸 업적을 달성한 위대한 인물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들. 그들이 말하는 역사는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차별점이 드러난다. 저자가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의 ‘서양 문명’을 낱낱이 풀어 헤치는 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을 매개로 삼기 때문이다.


인종, 신분, 사는 지역 등을 막론하고 선정된 14명의 이야기에서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어떤 식으로 계승되고 변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데, 그 이야기들이 자못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어, 고전기 그리스 시대엔 성별, 계급으로 차별할지언정 인종(피부색으로 인한) 차별이 없었으나, 18세기에는 인종 차별이 극에 달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18세의 흑인 노예인 소녀가 시집을 썼다가 법정에 서는 일까지 발생한다. ‘흑인’에 ‘노예’인 소녀가 그런 높은 수준의 글을 썼을 리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또,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메리카 식민지의 정착민들은 자신들이 영국인 개척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해방을 요구하지만, 그 독립과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비서양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의 ‘서양 문명’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에 따른 모순적인 태도가 도덕적 문제를 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그들에게 언제나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비서양인은 자신들처럼 ‘우월’하고 지적이지 않은 존재이기에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된다는 착각이 기저에 깔려 있어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니샤 맥 스위니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권력의 요구에 따라 교묘하게 편집되고 수정된 ‘서양 문명’의 거대 서사를 14명의 이야기를 통해 가감 없이 드러낸다. 또한 그가 제기한 문제는 해당 국가뿐만 아니라 ‘서양’과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국가에서도 충분히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주제가 아닐까 싶다.



▶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서양’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침략과 약탈을 반복해 왔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였고, 납치했고, 나라를 빼앗았다. 그들의 악행은 야만스럽고 잔혹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는 데 성공했다. 자기 입맛대로 만들고 덧씌워 재구성한 ‘서양 문명’을 앞세워서 말이다. 아마 이 만들어진 서양의 거대서사는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쉽게 대체되지 않을 거다. 다만, 이러한 문제 제기가 허구와 환상과 이익 관계에 의해 짜깁기 된 엉성한 탑을 언젠가는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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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디바이디드 : 온전한 존재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4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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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두용미의 끝판왕

시리즈(4권)를 전부 합치면 무려 2,240쪽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군더더기가 전혀 없다. 죄다 엑기스 중의 엑기스다. 먹으면 먹을수록 더 깊고 진해지는 맛. 책장을 넘기는 맛이 있는 그런 책이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내용이 길어지면 항상 등장하는 늘어지거나 지루한 부분이 없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완벽한 서사, 완벽한 흐름, 완벽한 결말. 시리즈의 종착역인 《언디바이디드》를 다 읽고 나서는 속에서 들끓는 온갖 감정을 가라앉히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여태껏 읽은 시리즈 중 가장 최고였다고.



▶ 가족이 뭐길래

<언와인드 디스톨로지>에는 다양한 모습의 가족이 나온다. 그들은 각각 화목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며 부자이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다. 왜 그들은 자기 자식을 그렇게 쉽게 버렸을까. 아이가 모범생이 아니어서, 이혼 후 아이를 맡기도 싫고 상대에게 양육권을 넘기기도 싫어서, 친자식이 아니라서,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에게 주먹을 날린 아들 대신 남편을 선택하려고,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그들이 언와인드 의뢰서에 서명한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이렇게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중 일부는 ‘무단이탈자’가 되어 가족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들은 궁금해한다.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증오와 슬픔과 환멸로 시작한 편지의 끝은 ‘그래도 사랑해’다. 이제 겨우 십대인 아이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가족은 자기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이 갖는 양가적인 감정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아이를 보내고 나서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바라던 삶을 살고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 또한 공존했다. 이기적인 이유로 아이를 너무나 쉽게 포기한 그들이 자기가 원하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든, 뒤늦게 아이를 포기한 데 대한 후회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전부 화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디바이디드》에서 그들의 현재를 언급했다. 길지 않게, 그러나 담백하게 그려진 그들의 모습은 생각처럼 화나 분노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서 버려진 직후부터 고통만 받다가 이젠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아이들이 떠올라 울컥하고 말았다.




▶ 경악하게 만드는 섬세함

이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작가의 섬세함을 논하는 것 같다. 《언디바이디드》도 예외는 아니다. 문장 사이사이 깔린 복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철저한 계산과 계획 아래 만들어진 내용은 의문조차 가질 수 없게 해 감탄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줄기세포를 플라스틱 안에 넣어 보관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해 보자. 일부는 저 플라스틱이 일반 플라스틱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일부는 소설적 허용이라며 넘어갈 수도 있고, 또 일부는 플라스틱에 줄기세포를 보관할 수 없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접근할지도 모른다. 이때, 닐 셔스터먼은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게 저 플라스틱이 줄기세포 보관을 위해 만들어진 제품임을 콕 짚고 넘어간다.

이렇듯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작가의 치밀함 덕분에 우리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세상 속으로 더 깊고 확실하게 빠져들게 된다.



▶ 《언디바이디드》를 포함한 <언와인드 디스톨로지>는 미국 아마존북스에서 선생님 추천 도서로 선정됐다.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만큼, 유해한 세계의 이야기를 건전하고 무해하게 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독서 외에도 해야 할 게 많은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 2,240쪽의 장편 소설을 감히 추천한다. 생명, 가족, 우정, 정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들고, 기승전결 또한 완벽하기 때문이다. 미루면 미룬 만큼 손해 보는 책.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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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포 투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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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용 테이블에서 나눈 단 한 번의 대화로 인생이 크게 변할 때가 많다."



▶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책

참 신기하다.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인데, 우아한 글을 자랑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에이모 토울스가 떠오른다. 그가 그런 류의 느낌이 나는 특정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런 식의 묘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그런 그가 쓴 단편은 어떨까. 에이모 토울스의 단편집은 처음이라 기대가 되면서도 처음이니까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대치가 높으면 실망하기 마련이니까. 솔직히 중편은 몰라도 단편에서는 전작들에서 느낀 감정들을 느끼고자 하는 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널뛰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명불허전. 역시나는 역시나다. 에이모 토울스는 전작들에 버금가는, 부담 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세련된 책들을 쓰는 데 또 성공했다.




▶ 6편의 단편, 다른 맛 다른 이야기

전체적으로 과함이 없는, 순한데 자꾸 당기는 맛이다. 그런데도 겹치는 주제나 캐릭터 성격, 내용이 하나도 없다. 단 하나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전부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뿐이다(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줄서기>는 주 배경이 모스크바지만 결국 마지막 종착지는 뉴욕이었다).

나에게 단편집의 재미나 인상을 좌우하는 건 단연 결말이다. 내용이 아무리 재밌어도 결말이 엉성하면 줄기가 꺾인 꽃처럼 책에 대한 호감도 이내 시들고 만다. 결말을 독자에게 맡긴다는 식의 무책임한 열린 결말, 일은 벌였는데 수습하지 못해 개연성 없이 다 죽이고 끝나는 배드엔딩, 반대로 새드엔딩은 안 된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급조해낸 해피엔딩 등. 하도 많이 당하다 보니 이 책을 읽을 때 조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책 속 단편소설들의 내용이나 결말은 완벽했다. 마치 각각 다른 영화를 본 것처럼.



▶ 《우아한 연인》 외전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우아한 연인》을 읽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읽었더라. 아마도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은 뒤에 에이모 토울스에 홀딱 빠져 연달아 읽은 듯했다. 《테이블 포 투》의 중편 <할리우드의 이브>는 《우아한 연인》의 외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꼭 《우아한 연인》을 읽을 필요는 없다. 앞의 내용을 알지 못해도 지장 없이 술술 읽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리우드로 간 이브. 그곳에서 그녀는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 안에 기차에서 알게 된 은퇴한 형사, 이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왕년의 스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스타와의 우정은 덤이다. 거기다 이브의 화려한 외모와 그에 못지않은 완벽한 언변에 빠져드는 사람이 속출한다.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당당한 태도 또한 그녀를 더 빛나게 하는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큰 특색 없이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 것 같은데, 2부에 들어서면서부터 장르가 바뀐다. 할리우드에 와서 친구가 된 배우 리비의 노출 사진이 이브의 손에 들어온 거다. 이브는 왕년의 스타와 은퇴한 경찰, 스턴트맨 지망생과 함께 협박범을 찾아 나선다. 반전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 이건 마치 에이모 토울스가 쓴 추리소설의 맛보기를 본 느낌이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이 중편을 읽고서 그가 쓴 추리소설을 기대하게 됐다. 아마 그건 단호하고 잔혹하지만 그 만의 품위를 잃지 않는 우아한 추리소설이 되겠지.



▶ 섬세함이 낳은 공감의 공간

에이모 토울스는 섬세하다. 분명 남자인데 여자가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캐치한다. 특히, <할리우드의 이브>에서 숙녀가 되기 위해 참는 것을 강요받았던 이브의 과거 이야기라든가 협박범으로부터 노출 사진을 받은 리브에게 ‘잊으’라고 한 이브가 느끼는 감정은 직접 경험해보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적이다.



또, 특정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는다. 가령, <나는 살아남으리라>에서 넬은 엄마에게서 계부 존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존이 바람난 것 같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말을 번복하지만 넬은 예정대로 존의 뒤를 쫓는다. 결과적으로 존은 바람난 게 아니었고(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이유였다! 내용은 책을 통해서!), 엄마와 존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넬은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입에 담는다. 작가는 넬의 이 행동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모든 작품에 마음을 ‘콕’ 찌르는 장면이 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그 장면. 이 책이 만약 영상이었다면, 수십 개 또는 수백 개의 짤이 만들어졌을 거다. ‘맞말 대잔치’ 혹은 ‘반박불가 맞말’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 항상 500페이지를 거뜬히 넘기는 책을 출간한 작가였기에 ‘에이모 토울스’하면 장편만 떠올렸지 단편은 연관 짓지 못했는데 이게 웬걸, 너무 재밌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단편소설로 작가 수련을 했습니다.……단편소설 창작에 의지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그 재밌는 걸 혼자만 보셨다고요?? 에이모 토울스를 애정하는 독자로서 앞으로 그의 책이, 장중단편 가리지 않고 많이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왕이면 추리소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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