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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망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기억이 있으신가요? 주인의 유한함 속에서 홀로 영원을 지향하는 기억 말입니다. 아마 알지 못할 겁니다. 그것들은 대개 잃어버렸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처럼 나타나니까요.
비밀의 운명을 지닌 기억을 말하려 합니다. 비밀을 말한다는 건 인생을 둘러싼 장막 하나를 걷어내는 일이 아닐까요? 하나가 사라져도 필시 다른 장막이 거인처럼 버티고 있겠지만, 한 번은, 꼭 한 번은 걷어내야 하는 장막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이 지긋지긋한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듯 깨달음 또한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죠. 전 강변북로에서 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진이 이야기입니다. 세진이는 어릴 적 제가 살던 동네의 약국집 딸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부잣집 딸이었죠. 사시사철 인중에 콧물 자국이 배겨 있던 동네 아이들과 세진이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뽀얀 얼굴에 개구리 마크가 달린 흰색 원피스를 입고 다녔죠. 이질감 때문이었는지 동네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는 못했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이질감’이라는 단어를 알 리가 없듯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유가 있었다면 하얗다 못해 어슴푸레 청색 빛이 도는 원피스가 더럽혀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 세진이와 제가 가까워진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저를 가르쳤습니다.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말이지요. 아버지의 말씀에 제가 알지 못한 깊은 뜻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척 엄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호기심으로 세진이 치마를 들치거나 위악적인 말들을 서슴없이 뱉던 남자아이들과 주먹다짐까지 벌였던 건 말입니다.
한 번은 어느 놈이 세진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가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는데, 니는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더라. 맞나?”
꽤 순진했던 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누가 그카더노? 니도 진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니 주워오고 나서 3일 후엔가 세진이 주워 왔다 아이가.”하고 말했습니다. 먼지처럼 사소한 거짓말에도 매부터 먼저 드셨던 어머니는 제가 아는 한 그때 처음으로 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와 세진이 모두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것도, 그 다리가 모두 진짜 다리라는 것도 말입니다. 저는 그 다리라는 존재가 두려웠습니다.
어머니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저는 가짜 다리를 입에 올렸던 놈을 흠씬 두들겨 주었습니다. 아마 세진이의 결백을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6학년이 되던 해 봄, 변두리의 약국이 신통치 않았는지 세진이네는 시내로 이사를 했습니다. <소나기>에 나온 보랏빛 이별을 해야 했었죠. 물론 그만큼 애틋하지는 않았습니다. 세진이는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한 5학년 때쯤부터 저를 멀리하기 시작했었으니까요.
애틋한 듯 무덤덤한 이별 후에 세진이를 다시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졸린 눈으로 프로야구 개막전을 보고 있던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세진이는 비었던 시간은 안중에 없는 듯 태연하고 나른하게 “우리 벚꽃 놀이 가자.”라는 말만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흩뿌린 봄비에 벚꽃 잎들은 뭉쳐져 길 가장자리에서 밟히고 있었고 나무는 앙상했었습니다. 우리는 눈부심이 막을 내린 길을 멀찍이 떨어져 걸었습니다. 시간이 만든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얼굴이 눈에 익은 선배 하나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세진이가 “흠……” 하고 숨을 내쉬는 사이, 선배는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제 어깨를 툭 치며 “잠깐 보자” 했습니다. 세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인지 이해한 저는 따뜻했던 세진이 손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배는 “니 세진이 하고 사귀는 거가?”하고 물었습니다. 흥분한 상태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 대답을 기다리던 선배는 이미 예정된 일을 말하는 양, 월요일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3학년 층 화장실로 오라 했습니다.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 “왜 말입니까?”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선배의 선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고 그 마음에 얼굴이 홧홧해졌습니다.
그 순간 세진이가 머릴 감싸 쥐고 허공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대상이 없는 절규 같았습니다.
“아악! 아! 다 사라져 버려!”
비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도 내리 비명을 질렀습니다. 마치 자궁에 들어앉은 태아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세진이의 모습에 왠지 모를 슬픔이 치솟았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비명은 선배가 사라지고 제가 세진이 옆에 섰을 때 뚝 멈췄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했고 선배에게서 벗어나게 해 준 세진이가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세진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저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벚꽃 놀이는 틀린 것 같다. 노래방이나 가자.”
지하에 자리한 노래방은 특유의 비릿함과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냄새에 취해 어깨를 맞대고 있으니 아찔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진이는 생소한 감정을 처리 못 해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 저를 옆에 두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번호를 눌렀습니다. 그리곤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빈약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습니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마음을 싣고서…… 이 밤이 새면은 첫차를 타고 행복 어린 거리로 떠나갈 거예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
3학년 층 화장실에서 저는 무참한 폭력에 굴복했습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에 몸이 덜덜덜 떨리고 이가 부딪혀 소리를 냈습니다. “왜 말입니까?”라는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겐 용기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무너진 끝에 얻은 선배들의 감시와 보살핌 속에 지내던 날이었습니다. <제3한강교>를 부르다 펑펑 울어버린 그 날 이후 아무 연락이 없던 세진이가 삐삐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오늘 자율학습 끝나면 동네 입구 공중전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전처럼 인사도 없이 건조한 목소리로 남긴 메시지였습니다.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율학습이 끝나고 몸보신이나 하자며 친구들과 통닭집으로 몰려갔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당시의 저는 무기력한 존재였습니다. 무기력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늦은 밤, 집으로 가는 길에 슬며시 바라본 공중전화 부스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명백한 비어 있음에 텅텅 소리가 날 것 같았습니다. 배회의 흔적을 찾을수록 점점 커지는 공백의 울림에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 날 이후 텅 빈 공중전화 부스를 바라보는 시간은 길어져 갔습니다.
그렇게 한 계절을 보냈습니다.
여름 방학 보충수업이 한창일 무렵 선배가 저를 운동장으로 불러냈습니다. 뛰어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는 제게 선배는 멍한 표정으로 “세진이 소식 아냐?”라고 물었습니다. 전, 또, 바보처럼, 양손을 세차게 흔들며 절대 만난 적 없다, 했습니다.
선배가 말했습니다.
“세진이 죽었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고 멀리서 텅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부모님이 여행을 간 사이 목을 매었고 그 자리에는 하혈로 인한 검붉은 피가 어지러웠다고 했습니다.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서에 갔었던 선배는 재수가 없다 말했습니다. 저는 “그게 할 말입니까?” 말하지 못했습니다.
*
제가 만약…… 건조했던 세진이의 메시지에 응답했더라면 무엇이 달랐을까요? 그날 밤 집으로 발길을 돌렸더라면 운명과 우연의 장난은 그쯤에서 멈췄을까요? 세진이는 가짜 다리를 받아들여야 하는 또 다른 생명의 운명이 버거웠던 걸까요? 그래서 제가 필요했던 걸까요? 저는 왜, 무엇 때문에, 그 부름과 기다림에 응답하지 못했던 걸까요? 두렵습니다. 이 우연과 폭력의 굴레.
서울 사람들도 잘 모르더군요. 누군가 건너고 싶어 했던 제3한강교가 한남대교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