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가 지끈거린다. 뇌가 목을 놓아버린 풍선처럼 픽- 쪼그라든 기분이다. 속은 울렁거리고 사지가 쑤신다. 왠지 부실하고 시시한 인간이 된 것 같다.
회식 다음 날이면 늘 이런 판이 벌어진다. 보통의 인간이 벌이는 초라한 다툼 같은 판. 흔적 없는 무너짐을 감당해야 하는.
아, 마지막 잔은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든다.
*
입사 6개월 차인 나는 회식이 있는 날이면 분주해진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폭탄주를 만든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는 건 내 마음을 담은 과장이고 거짓이다. 어떤 이들은 열렬히 원한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마치 중세 유럽의 흑사병처럼 무서운 속도로 많은 사람이 원하게 된다.
마법에 현혹된 나는 임원의 기분에 따라 소주량을 조절하고 적당량의 맥주를 부어 폭탄주를 만든다. 그리곤 바로 위 대리와 함께 신나고 들뜬 표정으로 은색 쟁반 위의 잔을 사람들 앞자리에 하나하나 놓는다. 이건 쉬운 일이다. 손목이 아프고 어깨가 좀 결릴 뿐이다. 힘이 드는 건 다음의 일이다. 몇 번의 잔이 부딪치고 건배가 외쳐진 다음.
폭탄주는 만년 부장이 막내 동생뻘 임원 입 앞에 상추쌈을 대령하게 하고 간신들이 눈치껏 분위기를 조성한 임원과 여자 직원과의 진한 러브 샷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러브 샷 잔이 비워지면 남자들은 환호하고 여자들은 임원의 입 앞에 앞다투어 삼겹살을 내민다. 날름. 혀가 움직이는 순간 “나이스” “간택받았네” “축, 승진” 같은 말들이 떠돈다. 남자들의 아내와 여자들의 남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 순간, 얼굴을 붉힌 채 고개 숙여 앉아 있는 한 여자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난 대책 없이 쓸쓸해진다.
젠장 할……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어제는 컨디션이 나빴는지 임원이 원하는 폭탄주 맛을 내지 못한 게 문제였다. 소주가 너무 많아, 맥주 거품 나면 맛없잖아, 같은 말들이 임원의 표정에 따라 간신들의 입에서 나왔다. 맛없는 폭탄주를 경건한 표정으로 연이어 들이켰더니 주위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사람들이 검은색 에쿠스를 향해 허리를 꺾는 장면 이후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집에는 잘 온 것이다.
심한 갈증이 몰려왔다.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욱. 물컹한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화장실에서 속을 비웠다. 우아악.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북한 소리였다. 무른 덩어리의 자잘한 파편들을 게우고 길게 늘어진 침을 손으로 거뒀다. 적막한 화장실은 세상의 끝 같았다. 네모난 화장실 창으로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화음이 맞지 않는 소리였다.
어제의 흔적이 묻은 양복을 걸쳐 입고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달이 떠 있었다. 일그러짐 없는 온전하고 풍성한 달이었다.
“아직도 있구나? 어젯밤에도 덩그렇더니. 다 봤지? 잘 가고 있는 거냐? 휴…….”
긴 한숨으로 쪼그라들었던 뇌가 조금 부푸는 것 같았다. 마음은 마냥 우둘투둘했다.
구석구석 스민 쓰라림을 달래며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위아래로 내저었다. 성의 없는 손짓에도 지나쳐 서 있던 택시가 후진을 해왔다.
“감사합니다. 후진까지 해 주시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생글거리며 말했건만 머리가 세기 시작한 초로의 기사는 낮은 음색으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뭘요.”
단 한마디로 피로를 생생히 전한 기사는 내가 목적지를 말하기도 전에 택시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택시는 크게 한번 휘청이더니 굉음을 내면서 뒤로 내달렸다. 멀미 기운이 느껴져 속이 뒤틀렸다. 욱-. 깊숙한 곳에서 신물이 올라와 식도가 따끔거렸다.
기사는 몸을 쥐어짜듯 뒤로 틀고 얼굴에 잔뜩 힘을 준 채 핸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중심이 잡히지 않는 핸들에 따라 차가 비틀거렸다.
“기사님. 왜 후진을 하세요? 위험하잖아요.”
내가 끓어오른 목소리로 말하자 기사는 차를 세우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면 어쩌라는 거요? 오늘부터 택시는 후진만 할 수 있는데.”
기사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나는 한층 더 목청을 높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장난이 심하시네요.”
“이보시오, 젊은 양반.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온 거요? 뉴스도 안 보시나? 오늘부터 택시들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132조 1항에 따라 후진밖에 못 한단 말이오. 후진. 뒤로 가는 거.”
기사의 강경한 태도에 풀이 죽어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흡, 하고 삼켰지만 분한 마음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마음을 다스릴 참으로 심호흡을 길게 두어 번 했을 때 길 반대편에서 갈지자를 그리며 후진하는 택시가 보였다.
‘응? 내가 아직 술이 덜 깬 건가?’
나는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도록 질끈 눈을 감았다. 자전하는 지구의 속도가 생생히 느껴졌다.
“뭐 하는 거요?”
그르렁대는 기사의 가래 낀 목소리에 놀란 나는 작게 눈을 떠 여러 각도로 창밖을 훑어보았다. 도로 위의 택시들이 뱀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뭐지? 말이 되나? 기사의 말은 또 뭐고.’
“어쩔 거요? 내리 실 거요? 뒤로 운전하느라 목에 담 오고 온몸이 틀어질 지경인데 실랑이할 힘없다오. 지친 거지. 지쳤어.”
기사는 몸과 얼굴에 힘을 풀고 잠잠히 말했다.
“아닙니다. 죄송해요. 제가 아직 술이 덜 깼나 보네요.”
내가 술이 덜 깬 건가? 그런 건가? 술이 깨면 택시들은 앞으로 갈까? 그럴까? 후진하는 택시 안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달이 보였다.
뭐가 잘 못 된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