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달력의 수요일마다 휴가를 쓰겠다고 결재를 올렸을 때 팀장은 적잖이 당황하는 표정이었다무언가에 도전받은 자가 보이곤 하는 얕은 적의가 설핏 드러나기도 했다그럼에도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엘리트답게 흔들림 없는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수요일마다 휴가라…… 무슨 교육이라도 받아다른 회사 면접 보는 건가아니지면접을 수요일마다 정해 놓고 볼 리도 없고.”

질문과 혼잣말을 번갈아가며 중얼거리는 팀장의 모습에 생각지도 못했던 통쾌함이 일었다사실 수요일마다 휴가를 내려 하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퇴근 시간 무렵 회의를 소집하고 밤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빨간 펜으로 난도질하는 팀장에 대한 소심한 복수아니었다난 기러기 아빠의 헛헛한 마음 때문인지 날이 갈수록 정수리 부근이 휑해지는 팀장을 은밀히 동정하고 있었다날 막 굴려 먹는 회사에 대한 복수라 하기에도 정기적인 휴가 사용은 스케일이 너무 작았다고작 9월의 수요일마다 자리를 비운 내 존재를 회사는 알기나 할까신경이나 쓸까팀장의 혼잣말 같은 질문에 답을 찾다 날아든 생각은 통쾌함을 서글픔으로 바꾸어 버렸다서글픔이 슬픔의 고개를 넘기 전에 아무 대답이라도 해야만 했다.

수요일마다 휴가를 쓰면 한 달이 훌쩍 지나버릴 것 같아서요.”

떠밀리듯이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휴일인 수요일은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한 것이다.’ 같은 진지하거나 거창하거나 혹은 얼토당토않은 위로의 메시지였고 일주일을 금방 지나가게 했다나만의 느낌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간혹 그건 느낌의 문제를 넘어선 실존의 문제였다난 때때로 시간이 훌쩍 흘러버리길 고대했으니 말이다많은 이들이 휴가를 연달아 사용해 해외여행을 계획하듯 난세로 방향의 휴가로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고 싶은 것뿐이다.

재밌네좋아창의적이야.”

휴가 신청서의 결재란을 볼펜으로 톡톡 치며 건넨 팀장의 말에서 못마땅함이 감춰진 태연함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창의적이어서 칭찬해 마지않는다는 느낌도 없었다. ‘좀 신선하네.’ 정도의 느낌만 어렴풋이 전달되었다.

수요일마다 뭐하려고하루 만에 어디 여행도 못 갈 테고.”

팀장은 결재 서류를 손으로 계속 문질렀다땀 때문인지 종이에 흐릿한 자국이 새겨졌다서류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것은 긴장되거나 신경이 곤두설 때 하는 팀장의 오랜 버릇이었다사적인 감정의 선을 아슬하게 타고 흐르는 대화를 끝낼 결정적인 것이 필요했다.

중력을 이겨내 보려고요.”

약간의 머뭇거림이 담긴 나의 대답에 팀장은 중력?”이라 말하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아무 반응 없이 결재판만 문지르고 있는 팀장을 보고 있으니 의식 저편에 켜켜이 쌓아 뒀던 나에 대한 분노를 끌어올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창의적인 도전이 허사가 될 수 있단 생각에 명치에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빨리최대한 빨리농담임을 알려야 했다

아침마다 제 등에 작용하는 중력을 이겨내 보려고요출근하는 날에는 등이 잘 떨어지지 않거든요중력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이전의 말이 가벼운 농담이었음을 알리려 빙그레 웃음까지 지으며 한 말이었건만내가 덧붙인 말은 상황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확실히 팀장이 끌어올리고 있을 분노를 가라앉히기에 적절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하하허 대리그냥 좀 쉬고 싶다고 해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결재할게.”

다행이었다팀장이 웃었다그리고 휴가를 결재했다이번 한 달은 수요일마다 중력은 무시한 채 늦잠을 자면 된다까치발 선 것처럼 경직됐던 몸 구석구석으로 안도감이 흘러 옆구리가 간질거렸다.

내가 이긴 건가이긴 것 같은데…… 그런데…… 난 어쩌자고 중력까지 운운했던 걸까중력을 거스르는 자유나 비상 같은 말들이 아른거렸다

휴가를 얻기 위해 얼렁뚱땅 뱉은 말이었다나에게중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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