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미스터 초이.

초이는 날 기억하나요헛된 바람이겠죠날 기억하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아요나 역시 책상 서랍 바닥에 깔린 명함을 보고서야 초이가 문득 생각났을 뿐이니까요.

9년 전세부다운타운장미원달러브레이크 댄스이 정도면 기억이 날까요?

우리는 9년 전 세부의 다운타운에서 만났어요나는 거리를 망연히 걷던 초이에게 원달러를 외치며 장미를 들이밀었고 초이는 그런 날 보며 싱긋 웃었죠웃음에 경계심이 풀린 나는 길거리에서 익힌 브레이크 댄스를 췄었어요잘 끌리지 않는 슬리퍼 때문에 툭툭 자주 끊겼던 문워크를나는 전력을 다해 슬리퍼를 뒤로 끌었지만 초이는 절실한 몸짓이나 장미가 아닌 내 얼굴을 유심히 봤어요그리고 가만히 물었어요.

아 유 코리안?”

9살의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죠장미를 싸게 달라는 말로 짐작하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어요사람들은 간혹 두 송이를 원달러에 사려 했었으니까요나의 고갯짓에 초이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지폐 2장을 내밀었어요내가 초이에게 장미 두 송이를 건네자 함께 다운타운으로 나왔던 동네 아이들이 초이 주변을 둘러싸고 원달러원달러를 외쳤죠그때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뛰어 왔어요아이들은 쏜살같이 골목으로 숨어들었고 초이는 눈앞에 벌어진 생경한 광경에 어쩔 줄 몰라 했었죠.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일상적이고 익숙한 풍경이었죠그래도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는 얼마나 무서웠던지아직도 하늘을 찢을 기세로 거리를 울리던 호루라기 소리를 꿈에서 듣곤 해요주위는 온통 암흑인데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만 삑삐익하고 또렷이 들려오죠.

경찰들은 초이에게 몇 마디 말을 하고 사라졌어요경찰이 눈에서 멀어지자 초이는 내가 숨어들었던 골목으로 뚜벅뚜벅 걸어왔죠.

무섭고 두려웠어요

지폐 두 장을 꽉 쥐고 막다른 골목 벽에 붙어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내 앞에 초이가 섰어요그리곤 네모나고 빳빳한 종잇조각 하나를 내밀었죠알지 못할 글자들이 잔뜩 적혀 있었어요당시의 나는 초이가 왜 그 종잇조각을 주는지 알 수 없었죠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그건 내가 한국 사람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

동네에서는 엄마를 코피노 맘이라 불렀어요엄마가 코피노 맘이었으니 나는 코피노였죠이전부터 내 생김새가 동네 아이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하지만 그건 별문제가 아니었죠나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따갈로어를 쓰는 필리피노였으니까요코피노라는 것이 불리지 않는 별명쯤 된다고 여겼어요궁금한 건 있었죠나와 얼굴색과 모양이 비슷한 아이들은 왜 모두 아버지가 없을까 하는

엄마에게 물었어요아버지는 어디 있냐고있기는 한 거냐고엄마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돈을 벌고 있다고 했어요우리가 견디는 시간이 길수록 아버지와 가까워질 수 있다말하며 내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어요짧은 머리의 남자와 젊은 엄마가 어깨동무를 하고 잇몸을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사진을요아버지라고 했어요언뜻 보기에도 웃는 모습이 나와 똑 닮아 있었죠그것만으로도 난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우리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주소로 부지런히 편지를 보냈어요엄마가 말하면 내가 받아 적었죠내용은 형편없었지만 엄마와 나는 온 마음을 다했어요우리를 그리워할 아버지를 위해서요그리곤 답장을 기다리면서 오랜 결핍의 시간을 메워나갔죠그런데 좀 이상했어요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오지 않았어요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말이죠.

기다림에 지쳐갈 즈음 문득 주소가 잘못된 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어요나는 알지 못할 글자들을 쪽지에 또박또박 옮겨 적어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재단을 찾아갔어요재단에서 마주친 직원에게 아버지가 한국인이다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말하고 쪽지를 내밀었어요쪽지를 본 직원은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주소가 잘못된 것 같구나.” 말하며 엄마를 만나야겠다고 했죠난 가슴 한가득 장미를 품은 채로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재단으로 데리고 갔어요직원은 창문이 없는 어둡고 침침한 방에서 쪽지에 적힌 건 주소가 아니라 전하는 말이 적힌 일종의 편지 같은 거라 말했어요내게는 주소가 아니라서 편지가 가지 않았을 거란 말만 할 뿐 어떤 내용인지 말해주지 않았죠.

내가 옮겨 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내가 주소를 왜가르쳐주냐 멍청한년아
좀놀았다 넌끝이다 18-08
SEOUL, SOUTH KOREA 
818-108
  
나는 아버지가 남긴 말이 궁금했어요주소가 아니라면 그 많은 편지는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얼마 후아버지가 남긴 말이 조롱 섞인 욕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억울함은 의문이 되었죠화가 나지는 않았어요왜 우리에게 그런 말을 남겼을까왜 그랬을까궁금증만 커질 뿐이었어요.

재단을 다녀온 후부터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한국인들이 우리 집에 다녀가기 시작했어요여러 사람이 다녀갔지만 총 네 장의 명함을 받았으니 네 무리의 사람들이 다녀간 거죠사람들이 다녀가고 나면 엄마는 나에게 물었어요.

아버지가 보고 싶니?”

난 망설임 없이 그렇다대답하며 아버지에게 물을 거라고 했어요왜 주소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었냐고우리는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고그날 밤엄마는 등을 보인 채 울었어요나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는 울음이었죠

엄마가 밤에 조용히 등을 들썩인 날로부터 일주일쯤 지난날미스터 장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어요걸음걸이는 비장하고 책임감이 강해 보이는 얼굴이었죠엄마는 미스터 장과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몇 장의 종이에 삐뚤삐뚤 이름을 썼어요.

미스터 장이 다시 찾아온 건 한 달 후쯤이었을 거예요모든 일이 잘되었다고 했죠아버지가 엄마에게 큰돈을 보내 주었다고 했어요비록 절반만 받을 수 있다 했지만 절반의 돈도 우리에게는 아주 큰돈이었어요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어요상기된 얼굴로 미스터 장을 뚫어지라 보며 아버지는 언제 오시나요?”라고 묻는 내게 미스터 장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아버지는 먼 곳에서 잘 계시더구나조슈아가 많이 보고 싶다고도 하셨어하지만…… 이제 돌아오시지 못한단다조슈아에게 많은 돈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지.”

보내준 돈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올 수 없다니그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왜요?”라고 묻자 엄마와의 약속이 그렇게 되어 있다 했어요어떤 약속이었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엄마에게 묻지 않았어요엄마는 깊은 밤에 또 울 테니까요미스터 장의 말에 내가 눈물을 글썽이자 옆에서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한 남자가 촉촉한 눈으로 내게 말했어요

조슈아모든 일이 이렇게 흘러간단다.”

그걸로 끝이었어요난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었죠

아버지가 보낸 돈은 여러 친척이 나눠 가졌고 엄마와 나는 똑같은 생활을 했어요해가 지면 다운타운에 나가 문워크를 추며 장미를 팔았죠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국인들이 자주 집에 와서 내가 밥을 먹거나 공부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갔다는 것뿐이에요나는 그들이 원하는 동작표정들을 정확히 해야 했어요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돌면 평소와 달리 밥도 반찬도 형편없이 먹어야 했고 절대 웃어서는 안 됐죠

초이.

지금은 많은 것들을 알게 됐어요코피노는 별명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으며 미스터 장은 비즈니스맨이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묻고 싶어요그들은…… 잘 있나요

조슈아
  
  
P.S 답장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이 편지가 태평양을 떠돌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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