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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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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롭다. 폭력의 일상이 총알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괴로우면서도 고요하게 엄청 웃긴다. 더 놀라운 건 반대 진영 보다 우리 편의 폭력을 주로 저격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80년대 군사정권과 운동권을 동시에 고발하는 격이다. 작가 애나 번스의 무운과 건강과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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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독서에 필요한 자질은 느긋함, 편한 의상,

문장을 음미하는 눈,

동심, 연애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기억,

진지함, 위트, 유머, 공감,  

호기심, 상상력, 시공간 이동술,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내 멋대로의 의견


*

<세상을 밝히는 에머슨 명언 500>,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문장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위에 쓴 것과 같은 글을 흉내 내기 기법으로 한 번 써보게 된다. 나름 재미있다. 써놓고 읽어보면 너무 많이 나열한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세에 명언을 남기는 위대한 인물이 될 계획은 내게 아직 없다. 그래서 그럭저럭 마무리.

 

*

 

오랜만에 서점에 가니 카르스텐 두세의 <명상살인 2>가 진열되어 있다. 1편을 흥미롭게 읽은 탓에 서슴없이 책을 집어 든. 보통 진열된 여러 권 책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남들 손이 안 탄 책을 고르려고 이리저리 살핀다. 어차피 나중에는 때가 묻고 종이도 접히고 표지에 흠집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첫 대면에서는 가장 산뜻한 걸 골라내기 위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하물며 즐거운 미소의 저녁 시간을 선사해주는 '명상살인'인데 더욱 정성껏 살펴야 할 터.


 

서점에 가기 전에 인터넷 알라딘에 접속해서 <새로 나온 책들>소개 글차근차근 응시한다. (자세히 읽진 않고 그저 잠시 응시한다. 하하) 이번에 끌린 책은 <지루함의 심리학 - 지루함이 주는 놀라운 삶의 변화>이었는데, 막상 서점에 가보니 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열대 책들을 구경하기로 한다. 우연히 예술적인 표지를 지닌 한 권에 눈길이 간다. 제목이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이다. 책을 펼치니 서양미술 작품 1000개가 깔끔한 컬러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진마다 간략한 해설이 적혀 있다. 내가 아는 미술작품도 있지만, 내가 모르는 작품들이 훨씬 많아 보인다. 모두 선명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 책도 사기로 한다.


 

세 번째로 고른 책은 과학 코너에 있는 책이다.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흥미를 끌지만 바닷속에서 물고기와 행진하는 인어가 그려진 표지도 매력적이다. 뒤표지 소개 글을 읽는다. "사랑과 혼돈, 과학적 집착에 관한 룰루 밀러의 경이롭고도 충격적인 데뷔작!" 정말, 정말일까? "이 책은 완벽하다. 그냥 완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정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사소하면서 거대하고, 별나면서도 심오하다." 너무 심하게 강력한 추천이네. "눈을 뗄 수 없다. 놀랍다. 심지어 충격적이다! 유명한 생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인생 이야기로 독자를 매혹하기 시작하고, 그러다 아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돌아서며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책은 당신의 가슴을 사로잡고, 당신의 상상력을 장악하고, 당신의 예상을 박살 내,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결국, 이 책도 구매하기로 마음먹는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늦었기에, 오히려 느긋해진다.

 


그런데 서점의 계산대에 줄이 평소보다 길다. 코로나 5명 시기라서 주말 독서 삼매경에 빠지려는 인구가 늘어난 걸까? 여하튼, 난 긴 줄의 맨 뒤에 선다.


 

내 앞에 키가 크고 젊고 앳되고 순진한 여대생 정도 된 여자애가 한 명 서 있다. 여자애가 흘끔 나를 자꾸 돌아다 본다. 나는 내가 고른 책 세 권을 왼손에 받쳐 든 채, 중년 아재답게, 중년다운 표정으로, 중년의 눈길로 먼 곳을 그윽이 바라본다.


 

톡톡, 여자애가 뭔가 결심한 듯, 내 쪽으로 몸을 확연히 돌리더니, 내가 든 책의 모서리를 살짝 건들며 말을 건넨다.

 


- 저기요, 책만 사려면 저쪽이 빨라요. 저기 저쪽이요. 바로 결.

 


나는 여자애가 가리킨 곳을 본다. 거기에는 <도서전용 카드결제-바로 결>라고 적힌 무인계산대 기계가 두 대 설치되어 있다.

 


여자애는 분명히 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만 골라든 중년 아재인 내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게 안타까운 것 같다. 친절히 바로 결제를 알려주다니!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하필 나라는 인간이, 카드를 안 쓴다는 거다.

(년 전부터는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카드를 지니고 다니면 충동적인 (도서) 구매를 심하게 하거나 충동적인 음주를 하거나 하기에, 우리 집의 의사결정권자가 카드를 모두 잘라 버리라 신혼 때에 지시했던 것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우리 집 의사결정권자는 여러 개의 내 명의로 된 카드를 들고 다니지만 나는 여전히 현금과 교통카드만 지참하고 다닌다. 코로나 백신 접종 증명도 휴대전화가 없는 탓에 종이 증명서를 발급받아 다니는 디지털 원시인이 바로 나다.

 


하필 나 같은 아날로그 아재에게 친절을 베풀다니.


 

나는 서점에서 만난 친절한 여자애에게 이렇게 말한다.


 

- , 나는 카드는 없고, 현금만 있고, 시간은 많아요


 

여자애는 무안함과 황당함을 느낀 표정으로, 아아, 하며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 몸을 돌린다.



*


 

아무튼

서점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이기적이 아니고 착하고 배려심이 깊은 것 같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제대로 고맙다고 말을 못 했는,

 


지금이라도, 학생신경써주어 고맙!

*


<1000개의 그림, 1000가지 공감> 읽는 법

- 먼저 그림을 들여다보고 이 그림의 제목이 뭘까 추측해본다. 그리고 제목과 설명을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읽는 법

-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이 살던 시절, 그 시대의 종교와 세계관의 분위기를 감안하고 읽는다. 나는 이 책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읽는 중이긴 하지만)

 











<명상살인 2> 읽는 법

- 1편을 먼저 읽은 뒤에 읽기를 권장한다. 명상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깨달게 된다. 살인할 때도 평온해진다.

물론 나쁜 놈 죽이기다.

유머는 보너스!

(물론 1편 얘기고, 2편은 아직 읽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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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연 부는 찬 바람에

유튜브에 끌리던 시선, 문득 돌리니

환기위해 아내가 젖힌 묽은 창(窓) 너머

소리 없이 내리는 첫눈

아, 겨울이구나.


훗날, 21세기 시민의 부질없는 디지털 삶과 덜떨어진 사고, 엉성한 감수성을 연구하는 분들을 위해 특별히 공개하는 나의 유치찬란한 모던 시(詩) <첫눈>의 전문ㅡ 푸하ㅎㅎ


*




대니얼 데닛은 <직관펌프-생각을 열다>에서 지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논하며, 77가지의 생각도구라는 걸 소개한다. 그 가운데 1부 1장을 차지한 맨 처음의 것은 놀랍게도 “실수하기”이다. 나는 제목만 보고도 심퉁! 한다.



(‘심퉁’은 '심쿵'을 잘못 쓴 것인데, 오타 고치기 귀찮아 그냥 내비 둔 조어로, 지금 생각해보니 ‘심쿵하다’와는 매우 다른 뜻을 지녔다. 심쿵은 멋진 이성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아래로 떨어진다는 매우 낭만적인 비유다. 반면, 심퉁은 심장이 화살에 맞은 듯 퉁, 하고 튕긴다는 매우 절망적인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실수투성이의 무수한 흑역사로 점철된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나 같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두렵고 찔리는 심정을 말한다.)



어쨌든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1부 1장에서

첫 번째 도구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정말 뜻밖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사의 상당 부분은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아주 솔깃한 실수를 저지른 역사이며 그 역사를 모르면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덧붙여 우리가 실수를 감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실수를 저질러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좋은 실수를 많이 할수록 우리가 그만큼 성장한다는 뜻이다. 그는 좋은 실수를 저지르기 위한 핵심 수법도 공개한다. 그것은 실수를 (특히, 스스로에게서) 감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수를 부인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자신의 실수가 마치 예술품인 양 머릿속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는 감정가가 되어야 한다고.




*




우리의 초고는 모호하고 엉성하며 비문투성이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써야 한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말, 마르크스가 하고 우디 앨런이 인용한 이 말, 양이 질을 결정한다는 이 말은, 나름 내게 용기를 준다. 실수를 겁내지 말고 많이 써보라는 뜻 같아서. 재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실수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나름의 해석) ^^;



나는 이 말을 슬그머니 고쳐본다.

“실수의 양이 질을 결정한다.”



아, 아니다.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해선 안 된다.

다시 슬그머니 고친다.

“실수와 수정과 작은 성공의 분량들이 모여 질을 결정한다.”



그러고나서 다시 보니,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역시 단순한 게 더 낫다. 그냥


“양이 질을 결정한다.”




*




휴가가 많이 남아, 그걸 안 쓰고 반납한다 해도 돈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억울해서, 뒤늦게 며칠 휴가를 내어 집에서 보낸다.

코로나도 무섭고.



내 딸은 집에 돌아와

손발 씻고나서 엄마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간다.


소외당한 나는

둘이서 무슨 이야기 하는지 궁금해진다.

안방 문에 다가가 조용히 엿듣는다


둘이 하는 말이 구체적으로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큰 그림을 이해할 정도로는 들린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갔다가 돌아온 

내 딸이

엄마랑

나누는 이야기는 전부 “주변의 황당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날, 아내가 전해 주는 이야기에는 전혀 다른 제목이 붙어 있다.


"우리 딸 원더 우먼”





*





연말 휴가 내고 요모조모 펼쳐 본 책들과 100자 평 

(* 주 : 연말에 출판된 것이 아님. 두서없이 집어 든 책들임)





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품위 있게 세상을 바꾸는 글. 우아하게 어퍼컷을 날리는 작가. 다른 계층, 다른 세상 사람들의 터전에 스며들어 같은 방식의 삶을 직접 체험한 뒤에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바버라의 다른 절판 서적을 구하기 위해 먼 곳의 알라딘 중고서점들을 가로지른 지난여름의 추억이 떠오른다.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 리사 펠드먼 배럿

최신 뇌과학 정보를 7개 강좌로 엮어 들려주는 책. 뇌과학 전성시대에 유튜브와 서점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허구가 퍼져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뇌의 마법과 진정한 가치를 담았다.















멘탈이 무기다 – 스티븐 코틀러

불가능에 도전하는 기술을 소개한다. 몰입과 창의성을 높이기 위한 유용한 방법을 논하는 자기계발서인데, 쉽지는 않다. 정독해야 가치를 알 수 있다.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

철학과 과학을 연계하는 글쓰기. 그가 소개하는 77가지 생각도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지적 무기에 가깝다. 첨단무기 사용 설명서처럼 꽤 어려운 구석이 많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음미하기 시작하면 흥미진진한 주제들에 심취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책임한 추천.)














STATISTICS Using Stata – Sharon Weinberg and Sarah Abramowitz

케임브리지 대학출판 서적답게(?) 쉽고 친절하다. 우울할 때 통계학을 읽거나 파이썬이나 Stata 코딩에 빠져든다. 실력은 없어도 이런 논리의 세계로 도피하는 이유는 있다. 불확실성을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고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 하비에르 마리아스

세 번째 정독하는 장편 소설.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우울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사색적인 문장들은 꼭 밤에 읽어야 한다. 작가의 호흡과 스타일에 젖어 들지 못하면 지루하고 읽기 어렵다. 하지만 일단 빠지면, 밤을 꼬박 새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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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선후보를 선택할 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투표를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며칠 전 어느 국회의원이 대선 후보 아내 두 분을 비교하며, 출산 경험이 없는 아내보다 슬하에 자녀 두 명이 있는 아내가 영부인으로 더 적합하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에혀. 바로 그날 외계의 과학자 ET 일행이 지구를 방문했다. 그들이 착륙한 곳은 바로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 외계의 ET 일행은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고.


*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여의도 공원을 지나 한강에서 산책을 자주 한다. 공원과 강변 코스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아직 남아 있는 단풍과 푸근하게 쌓인 낙엽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다. 동시에 곧 쇠락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괜히 쓸쓸하다. 그래서 가을 풍경 감상은 짧게 끝내고, 대신에 책을 펼치고 읽으며 산책한다. 이른바 ‘독서 산책’ 또는 '산책 독서'이다. 산책 독서는 '현장 독서'와 비슷하지만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나름 즐겁다.


(현장 독서는 책 속에 나오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바로 그곳 ‘현장’에서 읽는 것. 예를 들어 윤후명의 소설집 『강릉』을 강릉의 정동심곡에 가서 읽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눈 속의 시인학교>를,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강릉의 어느 문학관을 방문하여 읽는다면 아주 근사할 것이다. 특히 그날 눈보라까지 몰아친다면 이 단편의 미학이 두 배나 더 충격적으로 독자의 심장을 움켜쥘 게 분명하다.)




    소설 미학의 진수


*


독서 산책은 일반 도로에서는 위험해서 권장하기 어렵다. 인파가 거의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이나 강변 산책로에서는 매우 안전하기에 추천할 수 있다. 최근 고전소설을 주로 읽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에 빠져 지냈다. 이 작품은 1819년에 세상에 나왔는데, 배경은 1190년 십자군 원정이 있던 시기이다. 유럽을 강타한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지만,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명예와 관용과 용기, 기사도 정신과 로맨스가 완벽하게 미화된 이 과거의 시대는 순전히 문학 속에서만 존재하며 오직 작가의 상상에서 우러났다고 한다. (고전 명작을 소개한 『클라시커 50 고전소설』에 나오는 해설 참조.)


어린 시절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로 보았기에 이미 다 알고 있는 줄거리라고 여겨서, 처음에는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런데, 『클라시커 50 고전소설』에서 이 책에 대한 해설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에나 번스의 『밀크맨』에서 밀크맨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주인공 여자아이가 걸으며 읽던 책이 바로 『아이반호』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한번 산책하며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곤 이내 깜짝 놀랐다. 100쪽을 넘기면서부터는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순간마다 아쉬울 정도로 흥미로웠기에. 이미 진부한 것으로 여기던 기사도 이야기에 이토록 감동하다니!




로망과 액션의 품격



명쾌하고 돋보이는 해설

*


오늘 토요일 오후, 집안에서 오랜만에 현대 소설을 읽는 중이다. 어제 퇴근길에 재빨리 서점에 들러 산 책이 바로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이다. 인도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디파 아나파라의 데뷔작이다. 인터넷 사이트 <알라딘>에서 신간 소개 책들을 살펴보다가 이 책에 대한 소갯글을 읽고 책 구입을 참을 수 없었다. 우선 존경하는 이언 맨큐언이 “눈부시도록 찬란한 데뷔작”이라고 칭찬했다. 뉴욕 타임스는 “천재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소개 문구는 키커스리뷰의 “위트, 감동, 그리고 비애로 가득한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뉴욕타임스, 타임, 워싱턴포스트, NPR, 가디언이 선정한 '최고의 책'도 눈길을 끌었다. 서점으로 달려갈 수밖에.


막상 처음 100여 쪽을 읽을 때까지는 솔직히 그냥 그저 그랬다. 그러다가 150쪽 무렵부터, 특히 ‘교차로의 여왕’에 대한 사연과 그 뒤 전개에 이르러, 유머와 비애를 뒤섞는 작가의 솜씨가 비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래 영어 제목을 직역하면 ‘보라선 정령 순찰대’인데, 스모그 가득한 인도의 비참한 빈민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세계관이 놀랍도록 낯설고 매력적이다. 그러곤 신비한 모험에서 점차 비극적이고 불길한 정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나중에 자세한 독후 감상을 다시 써볼 계획이다.)




위트와 비애의 정경


*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고전적인 ‘아이반호’와 현대적인 ‘보라선 정령 순찰대’를 심층적으로 비교 연구해 보면 어떨까 싶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요소들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인지. 


19세기 작가 월터 스콧은 시대를 초월하여 읽히는 작품을 많이 썼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는 19세기의 전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디파 아나파라는 2020년 여성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월터 스콧의 작품은 12세기가 배경이지만, 로망과 이상적인 기사도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오늘날 등장한 디파 아나파라의 작품은 21세기가 배경이지만, 비애와 야만스런 폭력의 세계를 밀도 높게 묘사한다. 어찌 보면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품이 동시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점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이런 게 바로 문학의 힘인가, 싶기도.  


(한편 21세기 대한민국 국회가 자주 드러내는 성차별 인식이나 사고방식 수준은 월터 스콧의 작품 속 12세기 시대보다도 훨씬 뒤진 털북숭이 부족시대 수준인 것 같아 창피하다. 이런 부적절하고 시대착오적인 인식의 찌꺼기가 나의 무의식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봐 괜히 두렵기도 하다. ET 일행은 지구촌 명작 소설을 좀 조사하지. 하필, 저런 뉴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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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방안의 가득한 책들을 제대로 정리·정돈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들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책들을 4개 공간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종으로는 문학과 비문학. 횡으로는 비극과 희극이다. 즉 (1) 문학이면서 비극적인 작품 (2) 문학이면서 희극적인 작품 (3) 비문학이면서 진지한 작품 (4) 비문학이면서 유쾌한 작품.


나는 지금 (2)번 계열의 책을 읽고 있는데,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세계문학 단편선 33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이다. 영미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등장인물들이 P.G. 우드하우스를 언급한다. 그러면 괜히 반갑다. “천하 태평한 작가가 쓴 천하 태평한 인물들의 일상적 모험 이야기.” 내가 혼자 나름 정의해본 P.G. 우드하우스의 작품이다. 이 작가와 이 작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나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생을 그저 장난처럼 느끼고 싶어하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오히려 애초부터 인생은 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인생은 진지하게 살아야 하는 무엇이 아닐까, 하고 잠시 고민하는 것 같다. 이 점에서 역시 나는 어중간하다. 나는 이자크 디네센, 아베 코보,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같은 그런 글을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P.G 우드하우스 같은 그런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깨달음. 이 역시 내가 인생을 그저 장난처럼 여기고 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나는 인생을 진지하게 산 적도 없고 동시에 인생을 과감하게 장난으로 여기며 용감하게 산 적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술에 기울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P.G 우드하우스의 작품 속 주인공 지브스.

귀족의 하인이면서 모든 문제의 해결사인 지브스.

현대에서 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가 등장하는 책을 읽거나, 혹은 그의 이름을 아디로 사용하는 정도일 것이다.


*


"지브스." 내가 말했다. "자네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가끔 한가한 시간에 생각해 봅니다. 주인님."

"우울하지. 그렇지?"

"우울하다고요?"

"내 말은, 눈에 보이는 것과 실체가 다르다는 얘기야."

"바짓단이 반 인치쯤 올라간 것 같습니다, 주인님. 멜빵을 조금만 조정하면 될 겁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주인님?"


-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의 단편 <지브스와 임박한 파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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