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선후보를 선택할 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투표를 꼭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며칠 전 어느 국회의원이 대선 후보 아내 두 분을 비교하며, 출산 경험이 없는 아내보다 슬하에 자녀 두 명이 있는 아내가 영부인으로 더 적합하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에혀. 바로 그날 외계의 과학자 ET 일행이 지구를 방문했다. 그들이 착륙한 곳은 바로 대한민국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 외계의 ET 일행은 실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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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여의도 공원을 지나 한강에서 산책을 자주 한다. 공원과 강변 코스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아직 남아 있는 단풍과 푸근하게 쌓인 낙엽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느낌이다. 동시에 곧 쇠락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괜히 쓸쓸하다. 그래서 가을 풍경 감상은 짧게 끝내고, 대신에 책을 펼치고 읽으며 산책한다. 이른바 ‘독서 산책’ 또는 '산책 독서'이다. 산책 독서는 '현장 독서'와 비슷하지만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나름 즐겁다.


(현장 독서는 책 속에 나오는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바로 그곳 ‘현장’에서 읽는 것. 예를 들어 윤후명의 소설집 『강릉』을 강릉의 정동심곡에 가서 읽는 식이다. 구체적으로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눈 속의 시인학교>를,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강릉의 어느 문학관을 방문하여 읽는다면 아주 근사할 것이다. 특히 그날 눈보라까지 몰아친다면 이 단편의 미학이 두 배나 더 충격적으로 독자의 심장을 움켜쥘 게 분명하다.)




    소설 미학의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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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산책은 일반 도로에서는 위험해서 권장하기 어렵다. 인파가 거의 없는 이른 아침의 공원이나 강변 산책로에서는 매우 안전하기에 추천할 수 있다. 최근 고전소설을 주로 읽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에 빠져 지냈다. 이 작품은 1819년에 세상에 나왔는데, 배경은 1190년 십자군 원정이 있던 시기이다. 유럽을 강타한 베스트셀러 역사소설이지만,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명예와 관용과 용기, 기사도 정신과 로맨스가 완벽하게 미화된 이 과거의 시대는 순전히 문학 속에서만 존재하며 오직 작가의 상상에서 우러났다고 한다. (고전 명작을 소개한 『클라시커 50 고전소설』에 나오는 해설 참조.)


어린 시절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로 보았기에 이미 다 알고 있는 줄거리라고 여겨서, 처음에는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런데, 『클라시커 50 고전소설』에서 이 책에 대한 해설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에나 번스의 『밀크맨』에서 밀크맨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주인공 여자아이가 걸으며 읽던 책이 바로 『아이반호』였다는 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도 한번 산책하며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곤 이내 깜짝 놀랐다. 100쪽을 넘기면서부터는 책을 손에서 놓아야 하는 순간마다 아쉬울 정도로 흥미로웠기에. 이미 진부한 것으로 여기던 기사도 이야기에 이토록 감동하다니!




로망과 액션의 품격



명쾌하고 돋보이는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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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토요일 오후, 집안에서 오랜만에 현대 소설을 읽는 중이다. 어제 퇴근길에 재빨리 서점에 들러 산 책이 바로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이다. 인도의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디파 아나파라의 데뷔작이다. 인터넷 사이트 <알라딘>에서 신간 소개 책들을 살펴보다가 이 책에 대한 소갯글을 읽고 책 구입을 참을 수 없었다. 우선 존경하는 이언 맨큐언이 “눈부시도록 찬란한 데뷔작”이라고 칭찬했다. 뉴욕 타임스는 “천재적인 스토리텔링!”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든 소개 문구는 키커스리뷰의 “위트, 감동, 그리고 비애로 가득한 매혹적인 소설”이었다. 뉴욕타임스, 타임, 워싱턴포스트, NPR, 가디언이 선정한 '최고의 책'도 눈길을 끌었다. 서점으로 달려갈 수밖에.


막상 처음 100여 쪽을 읽을 때까지는 솔직히 그냥 그저 그랬다. 그러다가 150쪽 무렵부터, 특히 ‘교차로의 여왕’에 대한 사연과 그 뒤 전개에 이르러, 유머와 비애를 뒤섞는 작가의 솜씨가 비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래 영어 제목을 직역하면 ‘보라선 정령 순찰대’인데, 스모그 가득한 인도의 비참한 빈민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세계관이 놀랍도록 낯설고 매력적이다. 그러곤 신비한 모험에서 점차 비극적이고 불길한 정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나중에 자세한 독후 감상을 다시 써볼 계획이다.)




위트와 비애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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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고전적인 ‘아이반호’와 현대적인 ‘보라선 정령 순찰대’를 심층적으로 비교 연구해 보면 어떨까 싶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요소들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인지. 


19세기 작가 월터 스콧은 시대를 초월하여 읽히는 작품을 많이 썼지만, 그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는 19세기의 전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 디파 아나파라는 2020년 여성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월터 스콧의 작품은 12세기가 배경이지만, 로망과 이상적인 기사도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오늘날 등장한 디파 아나파라의 작품은 21세기가 배경이지만, 비애와 야만스런 폭력의 세계를 밀도 높게 묘사한다. 어찌 보면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작품이 동시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점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이런 게 바로 문학의 힘인가, 싶기도.  


(한편 21세기 대한민국 국회가 자주 드러내는 성차별 인식이나 사고방식 수준은 월터 스콧의 작품 속 12세기 시대보다도 훨씬 뒤진 털북숭이 부족시대 수준인 것 같아 창피하다. 이런 부적절하고 시대착오적인 인식의 찌꺼기가 나의 무의식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봐 괜히 두렵기도 하다. ET 일행은 지구촌 명작 소설을 좀 조사하지. 하필, 저런 뉴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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