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찰스 험멜 / IVP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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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책의 제목 그대로,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들도 담고 있고, 그것에 대한 설명없이 믿음을 요구합니다. 과학은 성경이 전하는 사랑과 존재 이유에 대한 아름다운 메시지들을 무시한채, 인간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릅니다. 이같은 관계가 과학과 성경간의 갈등의 핵심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학은 세상과 우주의 존재 방식과 운영 방법, 즉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성경은 세상과 우주의 존재 목적과 그 이유, 즉 왜 존재하는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과학적인지 혹은 성경적인지에 따라, 이것은 진리이고 저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할 수 없습니다.과학자이든 신학자이든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때문에, 판단력이 조금이라도 무뎌지는 순간이 생기면 권위에 따르려는 마음 때문에 과학을 또는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도 그것이 옳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성경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이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론입니다. 따라서 과학이 가지는 관점으로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점이 어떻게 다른가를 정확히 알아야 각각의 입장에서 온전히 판단을 내릴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자와 신학자가 대화할 때에도, 과학에 대해서 또는 성경에 대해서 표현한 말의 의미를 분명히 정의하여야 하며, 최종 진술을 내리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완전히 파악함으로서 바른 결론과 그른 결론을 가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시각의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 두 입장간의 생각을 비교하기 때문에, 결국 둘 사이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전문가 집단, 같은 시각을 가진 공동체들이 이와 같은 본질적 시각 차이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속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과학과 성경은 둘 다 옳고도 그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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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주의 허물기
필립 존슨 지음 / IVP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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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목 그대로, 다윈주의를 허물고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이 있었던 진화론과 창조론 두 입장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적어도 두 입장에 진리가 될 가능성을 동등하게 부여하자고 주장합니다.

다윈주의 또는 진화론, 그리고 창조론은 그 단어의 의미를 먼저 엄격하게 정의한 다음에 두 입장의 갈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각각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대해 토론한다면, 논점 일탈의 오류와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처럼 단순한 영역가르기 식의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진술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허튼소리 탐지기'를 작동하라고 권합니다. 어떤 진술을 접했을 때, 그것이 허튼소리일지 아니면 일리있는 진술일지를 구분하려는 엄격한 지적 판단의 과정을 거치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이 책에서 탐색해보고자 하는 진술은, 인간 존재의 근원과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하는 진술 중 하나이기 때문에, 허튼소리인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해명해 보아야 할 이유가 뚜렷합니다.

저자는 적어도 다윈주의가 과학적 연구결과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다윈주의를 반증하는 관찰 결과나 증거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제시할 것을 요청하라고 독자를 설득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의심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 결점을 가진 이론이라면 다윈주의는 분명히 틀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신이 세상과 인간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했다는 진술 역시 옳은 진술일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술에 대해서도 역시 허튼소리 탐지기를 작동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주체는 인간 생명의 근원을 결코 가볍게 무시해도 될 만한 명제로 생각하지 않는, 현명한 독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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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양장) 믿음의 글들 176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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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자는 인간이 영적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막으려하는 악마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영적 존재에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것과, 마치 영적 존재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반응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과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역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적인존재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영적 존재들을 파악할 때, 매우 왜곡된 관점으로 바라보게됩니다.인간들은 끊임없이 거부하려 몸부림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부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천사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거역하는 이 천사들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꾸며내어 속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 감히 영원한나라에 편입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에게 거짓말하는 하나님을 떠난 천사, 즉 악마입니다. 이제 막 한 사람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젊은 악마에게 그는 편지를 씁니다. 웜우드라는 젊은 악마가 행하고 있는 작업들을 평가하면서 그리고 충고하면서, 인간을 속이고 영원한 절망으로 이끌 방법들을 계속 제시합니다. 그의 제안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인간 영혼을오싹하게 할 만한 것들입니다. 또한, 인간의 약점을 매우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악마의 고백으로부터, 독자는 진짜 어리석음과 무지함이란무엇인지를 한시라도 빨리 알고 싶어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영적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그 영혼의 결말이 어떠할지 이 편지에세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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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믿음의 글들 40
우찌무라 간조 지음, 양혜원 옮김 / 홍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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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물이 동양세계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을 즈음, 일본인으로서 알고 있던 온갖 잡신들을 버리고 예수를 좇은 우찌무라 간조의 글입니다. 그는 중간중간 자신의 일기를 끼워가며 글을 지었습니다. 글은 그가 예수를 알기 몇달 전부터 시작해서 미국에 유학을 갔다 일본에 돌아온 때 정도까지 그의 삶의 과정과 생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처음 순수한 마음으로 태양의 신, 나무에 깃든 신 등 온갖종류의 신들을 섬기던 청소년기 시절의 자신을 회고하면서, 예수를 안 덕분에 섬겨야 할 신이 단 하나가 되어 좋았다는 표현을 합니다. 매일 서로 다른 신들에게 각각 따로 드려야 했던 기도를 이제는 한 번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처음 예수를 소개받고, 대학생 시절에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졸업하면서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는 온갖 치장물 뒤에 가려있는 온전한 기독교, 순전한 기독교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결국 학위는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온전한 진리를 알고자 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당장 눈에보이는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청교도가 세운 나라 미국을 동경하며 일본을 떠났지만, 그는 곧 미국 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면 또한 알게 되면서 크게 실망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세운 나라에 인종차별과 절도와 살인이라니.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고,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신학교의 총장님 등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드러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욱 기독교진리에 접근합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성공했으며, 그렇게 지나온 삶의 과정을 바탕으로 그 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의 말미에 서술합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글을, 그의 영혼의 항해일지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구원의 주체이자 자기 영혼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항해해 온 이 여정은,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진리를 겸손하게 좇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는 예수를 알기 전의 그를 이교도라고 표현하면서, 그 때가 영적으로 어둡고 암담한 상황이었음을 이후에 알았다고 합니다. 독자에게 물질과 정신, 그너머 이 세상 근본의 영적 상황들을 분별하라고 권합니다. 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두움에 내던져진 상태라며 안타까워합니다. 참으로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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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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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평생을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에 바친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유난히 먹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도 있고 자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도 있듯이 알고자 하는 욕구가 일반적 수준보다 지나친 사람도 있는데,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합니다. 그는 더 아는 것, 더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만의 앎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이용했던 방법을 소개합니다.

알고자 하는 욕구를 채우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도구는 바로 책이라고합니다. 얻고자 하는 정보가 있을때, 필요한 비용이나 노력 그리고 효율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책을 능가할만한 도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진 정보의 또다른 유통방식도 언급하면서, 전자장비와 기술이 아무리 발달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종이책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정보전달력에는 미치지 못할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가 꽤 오랜 시간동안 지식을 쌓아온 뇌과학이 이 생각의 결정적 근거가 됩니다. 뇌의 무의식적인 작용과 정보습득력을 믿어보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전통적인 책이 지식습득에 있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결론을 부인하지 못하게 할 만큼 설득력
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지적 호기심을 채워왔는지 읽어보면, 궁금해하는 것, 알고 싶어하는 것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앎의 세계를 창조하도록 독자를 부추깁니다. 그동안 혹 전혀 채워보지도 못했을 수 있는 그 욕구를, 욕심껏 채우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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