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원작의 배경이 한겨울이라면, 이 영화는 초가을에서 초겨울처럼 보인다. 오한이 들정도로 차갑고 눅눅한 아우라를 흠씬 풍기는 책에 비해 영화는 다소 한가롭게보인다. 고유명사를 의도적으로 지우며, 인류문화의 백지화를 동경했던 것과는 달리 영화는 실체를 빈곤하게 드러내며 상상력을 앗아간다. 플롯과 미장센의 우유부단함이 여실하여 이야기가 깊이가 없어보이는 와중에 비고 모텐슨 홀로 펼친 분투어린 연기는 영화의 불완성도를 오히려 강조하는 꼴이다.
 

엄마인 샤를리즈 테론을 전형적인 요부로 그림으로써 원작이 숨긴 의도를 천박하게 드러내기까지 한다. 원작의 영향은 일찌감치 예측되었던 바,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유색인종을 빼고, 무기력한 도둑으로 흑인을 캐스팅한 것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헐리웃의 영향을 더불어 생각할 때, 내가 갖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유색인종은 '지구 종말'이라는 자극적인 주제에 호기심을 갖을지언정 주체는 될 수 없다는 점 말이다. 코믹 매카시는 자신의 작품의 진정성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제 3세계의 관객들이 그들(헐리웃 주류)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유혹적인 단어(전세계, 인류, 지구 멸망, 마지막 사랑 기타 등등)들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의 관심과 불안은 지구의 멸망따위에 있는게 아니라 패권의 향방에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바마 집권내내 백인아버지의 활약을 담은 블록버스터 작품들이 내내 활개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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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매체에 대한 기성세대의 불안은 새로운게 아니다. 늘 그렇듯이 보수적인 기성세대는 '새로운 것'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으며, 불안을 증폭시켜 대중의 여론을 환기시켜, 결국 통제를 정당화시키는데 몰두한다.

 

인터넷을 이용한 공포 영화들 대부분이 이렇듯 기성세대의 불안을 담고 있다. 여기에 맞춤하게 범죄자들은 젊은 청소년이다.

 

이 영화도 이런 심리에 기대 편의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렇다고 몰염치하지는 않다.

 

젊은이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아버지의 자살을 생중계하고 재탕으로 우려먹는 황색저널리즘 매체에 대한 복수라는 것.

 

복수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이 교묘하게 이용되면서, 인터넷을 즐기는 네티즌들이 본의 아니게 공범자가 된다.

 

사실 제 8의 예술이라 불리며 홀대와 사랑을 동시에 받아 온 영화가 새로운 강력한 매체의 도전 -즉, 인터넷- 을 받아 그것의 장점보다 단점을 집중 조명하며 불안을 증폭시키는데 앞장서는건 아이러니다.

 

그 인기만큼이나 흑색선전에 시달리는게 새로운 매체의 숙명인 듯 싶다.

 

그레고리 호블릿은 저예산 영화인 '쏘우'의 아이디어를 인용해, 범인의 동기가 확실하고,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는 헐리웃 영화로 포장했는데, 이것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훈육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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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안 맥완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199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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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재치와 위트가 가득한 이 소설이 짧고 간결해서 더 좋았다.
하지만 존경할 만한 통찰력을 갖춘 클라이브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데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바. 특히나 그를 좋아했던 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나 통찰에 대한 인식이나 지향점이 나와 유사해서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황야없이도 더 없이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필요로하는 야외공간이라고는 시골 식당과 봄철의 하이드 파크가 전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온전히 살아 있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여기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없었다. 단지 주변환경이 인간에게 무관심할 뿐이었다.'

 

음악가 클라이브의 생각이건 아니건 적어도 화자는 클라이브를 통해서 이런 통찰을 내비친다.

 

이렇듯 현명한 그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점에 주목한다.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고, 질투, -그것도 죽은 여자를 두고- 에 사로잡히면서 이성과 지식은 살인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암스테르담'은 이성이나 지식 혹은 교양이 편리한 도구 혹은 위험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다. 자신의 합리화를 위한 도구 말이다. 착각이라는 유혹에 손쉽게 흔들리는 것이 이성인 바, 나 자신 어느 경계를 걷고 있는지 불안하다.

 

 책을 읽으면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떠올리곤했는데, 전지적으로 언급되는 인물들의 냉정한 평가와 각 개인의 심리를 묘사할 때의 보다 긍정적인 묘사의 묘한 불균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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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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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나 영화, 접하는 것마다 아버지의 부재로 치닫는 요즘에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는 특이하게도 아버지의 존재감을 무겁게 확인시켜준다. 반 모권적으로 비쳐질 수 있는 엄마도 아들을 포기한다는 설정은 현시류에서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의 무한정한 인내와 애정이 그려지는 가운데, 그의 죽음 이후 그자리를 대신하는 사람 또한 또다른 아버지다. 엄마의 부재 속에 아버지 그리고 계부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흐름은 스러져가는 '가부장'을 복권할 태세다. 이것이 '더 로드'를 이끄는 주요 동력이고, 이것을 증명하듯 아들은 지옥의 환경에서도 아버지의 품안(엄마가 아닌)에서 편히 잠든다.

 

'가부장의 복권'이라는 주제를 잿빛으로 위장한 복고적인 이 소설은 무척 보수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잿빛으로 덧칠된 지옥에서 슬퍼할 인류를 (엉뚱하고 무식단순하지만) 인종적으로 분류한다면, 잃을 것이 누구보다 많은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이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영화화된 '더 로드'에서 주연은 비고 모텐슨이 맡았다. 고유명사를 지워버려 흑과 백, 사람 이름도 구분이 안되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순간 백인부자가 떠오른다거나 이 역을 백인이 맡는 건 억지스런 일이 아니다. 백인이라야만 '더 로드'의 지옥상황이 설득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강력한 가부장의 권력에 대한 향수가 있어야만 책은 재밌다. 세계의 파멸이라는 전지구적인 거대한 배경이 온당하려면, 세계를 쥐락펴락하며 휘어잡았던 권력에 대한 향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 우리 상상력은 이미 사로잡혀 있다.

 

욕망을 가린 중세의 지나치게 엄격한 수도승 복장으로 시지푸스의 고뇌를 흉내내며 오늘도 전진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반동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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