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9일, 하노버 근처의 볼펜뷔텔(Wolfenbüttel)에 다녀왔습니다.
남북으로나 동서로나 독일의 한 복판에 있는 곳이랍니다.
이 도시 토박이인 철학과 교수님이 학생들을 초대한,
당일치기 철학과 세미나 여행에 살짝 끼어서 따라간 거죠.
낯을 별로 안 가리는데다 궁금한게 많아서
이런데 낑기는 거 무척 좋아한답니다. ^ㅡ^
르네상스 시대 독일 최초로 도시 계획에 따라 정비된 도시이고,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어진 곳이며,
작가 레싱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거주했던 도시, 볼펜뷔텔.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아우구스트 대공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라이프치히 대학의 서적학과에서도
작년에 이곳으로 세미나 여행을 했다지요.
이곳은 당대 독일 최대의 도서관으로,
13만여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16~17세기의 인물 아우구스트 대공 혼자서(!)
이 장서를 모두 수집했으며 그 목록을 모두 꼼꼼하게 카탈로그에 기록해두었습니다.
이 방은 아마도 신학과 역사학 관련 장서가 있던 방이었을 거예요.
이렇게 책으로 가득한 방이 몇개 더 있답니다.

이 할아버지가 만년의 아우구스트 대공입니다.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연구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숨이 컥 막히게 생긴 사람이
숨이 컥 막히는 공간에서
숨이 컥 막히는 행적을 남겼다는 평이 우리들의 중론이었습니다.
문득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라는 책 제목도 떠오르더군요.

이 도서관 한켠에서는 전설적인 서체 디자이너
헤르만 차프(Hermann Zapf)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딴 Zapf Dingbat, Zapf Chancery로부터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선호하는 Optima, Palatino에 이르기까지,
숱한 유명한 서체를 개발한 디자이너이지요.
그의 칼리그래피 및 활자 서체에서부터 디지털 폰트까지.
원본의 스케치와 설계도가 모두 근사한 취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연히 접한 전시회인데 기대 이상으로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의 수작업과 구상안은 문화적 배경에 뿌리를 둔 탄탄한 기초와 진정성을 지니고 있어서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도서관과 서체 디자이너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요?
이 도서관은 16~17세기의 수많은 장서 원본을 소장하고 있어
필체 및 활자 연구에도 매우 이상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진은 금속 활판에 새긴 서체와
그것을 판화하듯 종이에 찍어낸 작업물입니다.

고급스런 하얀바탕의 두꺼운 종이에 무광금박처리한 칼리그라피.
우아하고 멋진 필체와 세련된 감각을 가진 서체 디자이너지요?
이상 모두 몰카 도촬이었으니 사진 컬리티를 문제 삼지 마세요. ^ ^
사실 난 헤르만 차프의 전시를 더 보고 싶었는데,
할 수 없이 졸린 철학과 세미나를 들으러 발길을 옮겨야 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 많이 한 후에 헤르만 차프의 전시회에 또 가봐야겠어요.
우리 학교에도 '프레드 슈마이어스(Fred Smeijers)'라고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서체 디자이너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 수업도 많이 기대하고 있답니다.

도서관 견학을 마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시내를 둘러본 후,
학생들은 교수님 댁에 초대받았습니다.
이곳은 교수님의 서재예요.
아우구스트 대공의 도서관 견학 이상으로 인상적인 방문이었지요.
철학과 독일 학생들도 정말 멋진 서재라고 감탄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철학의 현장이군!'
방에는 벽면이 총 10개 있었습니다.
정10각형이 아니라 작은 사각형 몇개가 이어진 형태의 방이었는데,
그 10개의 벽면이 모두 이렇게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책상도 여러개였고요.
저 많은 책들을 주제별로 정리도 참 잘 해놓으셨더군요.
고대 철학, 중세 철학, 프랑스 철학, 19세기 낭만주의 문학, 현대 철학..
여기서 퀴즈 하나,
저기 축음기 비슷한 음악 나오는 기계(?) 위에 걸린 그림,
누구의 초상인지 아시는 분?
맞추시는 분께서 4주년 기념 정모에 나오시면
소정의 선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 ^

역시 교수님 방의 일부.
우리를 인솔하셨던 교수님은 볼펜뷔텔 토박이십니다.
일주일에 한번 수업 있는 날만
2시간 30분~3시간 걸리는 라이프치히로 오신다고 하네요.
작은 도시에서 나름 유명 인사일테고, 또 평생 살아서 그런지,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옛 도서관 관장과 시 당국의 논쟁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는 중에
나이 지긋하신 분이 인사를 하며 지나갔는데
'저 사람이 지금 말한 옛 도서관 관장이십니다.'
라고 하시기에 학생들 모두 기막힌 타이밍에 감탄하며 웃었지요.

교수님의 서재를 점령한 철학과 학생들.
이날의 세미나 여행에 참석한 36명 학생들을 위해,
교수님이 손수 야채도 썰고 밥도 지어서 따뜻한 저녁을 요리해주셨습니다.
어디서 빌렸는지 그 많은 양의 밥을 짓기 위한 큰 남비 두개를 매고
학생들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셔야 했어요.
와이프 없는 독신 남성이라서 모든 걸 혼자 준비하셨고,
철학과 학생 몇명이 교수님을 도와 서빙을 했지요.
저는 가만 있는게 도와주는 것이란 충고를 자주 들어온 터라
잠자코 저녁밥과 맥주를 먹고 마시기만 했습니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
값진 책들이 가득 꽂혀있던 도서관과 서재,
학생들을 위한 교수님의 사려깊은 초대,
육체적 정신적 양식을 배불리 섭취하고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작성자 : 유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