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 어릴 적, 가장 맛있던 기억은 유채꽃밭이다. 병아리 솜털같던 꽃술과 손톱만한 겨자색 꽃술을 가진 유채꽃밭을 보면 입 안에 침부터 고였다. 툭, 꺽어서 푸른 실이 가닥가닥 붙어있던 겉껍질을 한 거플 벗거내면 투명하고도 끈적한 액이 손에 묻어났다. 분명, 한 번도 먹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지만, 유채꽃을 사탕 수수라 생각했다. 투명하고 끈적한 액이 묻어있던 한 거플 벗겨진 유채꽃대는 딱, 솜사탕 몇 가닥이 붙어있던 나무 젓가락같이 감질맛나는 달콤함을 주었지만, 딱히 사탕을 사주지 않던 그 시절, 그만한 달콤함은 동생 분유통에 손가락을 찍어먹던 이후로 처음이었던 게 분명했다.

라고, 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찌 어릴 적 기억이 이토록 맛난 유채꽃밭만 있었겠는가. 오히려 사탕을 사주지 않는다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탕을 훔치다가 걸려서 카운터 앞에 손들고 서 있다가, 엄마가 '동네 창피해서 못 산다' 라고 나를 때리면서 울다가 , 사탕을 한 웅큼 집어 와서 보란 듯이 사들고 나 목덜미를 끌고 집으로 가던, 그런 시간들이 더 많던 어린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은 돌이켜보면 천진난만하지도, 명랑하지도, 그리 유쾌하지만도 않은 나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내 일기장 어디에도, 난 아이여서 좋다, 라는 말은 없다. 항상 '어른이 되고 싶다. 빨리 커서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 라는 말만이 그득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니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련하고, 유쾌하기만 하다. 학교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하던 오색 공기 놀이, 떡볶기 안의 오뎅 한 조각 잘라먹으면서 깔깔대던 웃음, 학원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체크 무늬 남방 남학생의 바람 냄새. 심지어 체육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다가 걸려서 도시락을 입에 물고 교무실 구석에서 손 들고 있던 기억마저 서른 살에는 나의 어설프면서 치기어린 영웅담으로 둔갑해버렸다. 분명 그 때 당시에는 그 교무실에서 손을 들고 있던 나는 도시락 좀 까먹었다고 그런 창피를 주는 체육 선생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16살 독기 어린 소녀였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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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친구가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해' 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열 장도 안 읽고 책장에 놓아버렸을 책이다. 그 정도로 줄거리가 뻔하디 뻔한 80년대 한 가족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뻔한 달동네와 며느리를 학대하는 뻔한 시어머니, 아내의 핍박을 무시하던 뻔한 아버지, 결국 뻔하게 죽어버린 선생과 어린 여동생, 그리고 역시 뻔하게 미치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화훼관련 책인 줄만 알았던, 그래서 오래전에 보고도 읽어보지 않던, 친구가 내가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서 건내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꼼꼼히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다보니 그 뻔한 이내 삶의 사이를 채우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나는 참으로 뻔한 삶만을 바라보고 그 사이를 채우는 것들에 대해 무관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뻔한 사람들 사이를 채우고 있던 것들은 구부러진 등을 안을 때 토닥토닥거리던 어린 여동생의 손가락이요, 넘어져서 생채기가 날 때조차 그 바람에 사뿐히 날리던 연분홍 벚꽃이요, 카스테라를 만들 수 있는 밀가루라며 시멘트 벽돌을 열심히 빻아주던 손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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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하는 것은 그 사탕을 훔쳐서 목덜미를 잡혀 가던 아이가 아니라, 16살 독기 어린 소녀가 아니라, 유채꽃대를 훓던, 어설프면서 치기어린 도시락 까먹기를 하던 아이만이 가슴 속에 남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다 읽고 나니 어린 여동생을 자기 손으로 보내고 시멘트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동구가 아니라 '단술같은 바람 속, 융단같이 깔린 낙엽' 위에서 여동생을 위해 감나무 감을 따려고 폴작거리며 웃고 있을 동구가 생각난다.

속눈썹까지 간질거리는 이 봄 날, 내 마음 속, 그 유채꽃대를 훒던 그 아이를 기억하게 해 준 이 작가에게, 솜사탕 하나 날려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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