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 - 인류 최후의 에덴동산, 아마존 오디세이
정승희 지음.사진 / 사군자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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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생활 다큐멘터리가 TV 속에는 성행이다. 그런데 픽션도 아니고 논-픽션인 생활 다큐멘터리 속에서 삑-소리 나는 욕을 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의 광경이 꼭 나온다. 정말 영화같이, 드라마같이, 절정 부분에 가면 갈등이 생기고, 영화같이, 드라마같이 사람들이 싸운다.

창피하지도 않나?

그래서 생각하길, 담당 PD가 그러한 상황을 적당히 ‘연출’ 하고 쌍방 동의하에 찍은 논-픽션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어찌하여 한 공영 방송 다큐멘터리에 나름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그 상황은 100% 픽션일 수 있다, 고 알게 되었다. 한 달 가까이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심지어 낮잠 자는 시간까지) 카메라를 들이미는데, 어찌 그 앞에서 부부가 말다툼하는 모습을 안보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부부가 갈등하는 모습을 한 번 찍고 싶다고 넌지시 말도 했던 터라, 나와 남편이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자 무겁다고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본능적으로 번쩍 들더니 코 앞에서 찍기 시작했다. 정말 부부 싸움은 논-픽션이었다고!

그런데, 정작 물에 빠진 돈을 말리지 않았다고 야단치던 남편에게 야속했던 마음이 PD 에게 돌아간 것이다. 우리 심각하거든요. 그 카메라 좀 내려주실래요? 부부가 말다툼을 하면 말리지는 못할 망정 온 동네 방네 소문을 다 내려고 하는 그 ‘직업 정신’이 너무나 얄미운 것이다. 더구나 마침 이러한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찍는 그 순발력에 또 한 번 심사가 뒤틀렸다. 시청률도 생각해야 하니깐, 이라고 이해하면서도 한 인간의 감정 앞에서 무감정으로 일할 수 있는 그런 익숙함에 소름이 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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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를 소름 끼치게 읽던 딱 중간, 이 책의 저자, 정승희가 궁금해서 검색을 했다. [KBS 도전 지구 탐험대]의 PD. 10년간 미국에서 머물면서 아마존 60여개 부족을 촬영 방송. 그러고 보니 발가벗고 커다란 뱀을 휘감고 애벌레나 개미 따위를 먹는 인디언과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가슴 부분을 가리고 다니며 ’어머나‘를 연발하던 연예인의 모습을 TV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왜 [도전 지구 탐험대]는 종영을 하게 된 것일까.

개그우먼 정정아가 아나콘다에 물리는 사건으로 [KBS 도전 지구 탐험대] 종영.

기억이 난다. 정정아가 아나콘다에 물렸는데, 응급처치를 한 뒤 촬영을 다 못했다고 아나콘다의 이빨을 상처에 다시 꽂고 재촬영을 요구했다는 PD 이야기까지도. 그런데 그 PD가 이 책을 쓴 정승희 PD다. 절반 가까이 이 책을 읽은 나로써는 문명인들을 ‘자연을 떠나 왜 그렇게 불행하게 사냐고’, ‘무엇인가에 중독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 아니냐고’ 위로하고, 개미와 모호이 애벌레와 모뻬이다 애벌레 사이에서 더 맛난 게 무엇일까 갈등하고, 인디오의 돈은 몸빼 주머니에서 나오는 할머니의 꼬깃한 지폐처럼 살아있는 생물이라던 그 정승희 PD와 아나콘다 이빨을 상처에 다시 꽂고 재활영을 했다는 정승희 PD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반나절의 검색 끝에 정승희 PD와 개그우먼 정정아가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언론사의 오보이다, 라고 했고, 정정아는 손해 배상을 받고, [도전 지구 탐험]은 종영했고, 정승희 PD는 [스타 뉴스]와의 인터뷰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4년 전부터 준비해온 남미에 대한 여행정보와 남미 촬영 정보를 담은 교과서적인 책을 집필해 출간하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행정보 책에 정정아 사건을 집중적으로 담으려 한다. 시골로 내려가서 근신하면서 글을 쓰겠다.“

2005년 10월에 프로그램은 종영되었고 딱 1년이 지난, 2006년 11월에 이 책이 나왔다.  정정아 아나콘다 사건 이야기는 그의 첫 번째 책,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에는 나오지 않고, 열혈 게스트였던 미스코리아 손민지가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와 여자들만 있는 야르브족의 아나콘다 사냥 이야기만 나왔다.

그는 정정아 사건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일까,
쓰지 못하게 한 것일까,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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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청년, 이창수는 KBS 월드넷에 4부짜리 여행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로 결정하고, 자전거로 쿠바를 횡단한다. 그 여행을 다룬 [원더 랜드]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이창수의 쿠바 자전거 여행에 필요한 그림: 하바나 전경 스케치, 바닷가, 재미있는 장면, 주행 도중 넘어지는 장면, 재미있게, 감동적인 상황을 적절히 섞어...’ 앞으로 일주일간 찍게 될 나의 자전거 여정을 일종의 휴먼 드라마로 승화시키겠다는 계획인 것 같다. 하지만 자전거 펑크가 나고, 내가 주행 도중 넘어지는 위험천만한 장면들을 염두에 두어다는 것은 썩 기분이 좋지 않다. PD 형이 내 뒤를 따라오면서 ‘어서 넘어져’라고 부두식 주문을 외우지나 않나 모르겠다.

-중략-

자전거가 펑크 났을 때에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다가 펑크가 나면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다. 펑크를 때우는 작업은 그리 힘들지 않지만 의욕이 몸속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PD형은 기쁜 얼굴로 차에서 내려 펑크 난 바퀴와 그것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촬영했다.

이창수는 일주일간의 월드넷 다큐멘터리 촬영을 끝내고, 마지막 남은 일정을 차질 없이 끝내기 위해서 얄밉던 PD 형 배웅은 커녕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니께로로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말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한참을 가다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오늘 니께로까지 가지 않으면, 그래서 원래 목적했던 카보 크루즈에 가지 않는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중략- 바야모에서 7km 정도 간 곳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PD 형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형은 대합실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들고 대합실까지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형은 번쩍 손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얼싸안고, 얼마나 아쉬웠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곤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셨다. 따뜻한 맥주였지만, 더없이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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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희가 말하는 아마존은 인류 최후의 에덴 동산임이 분명한 듯 하고,
이창수가 말하는 쿠바는 체게바라 티셔츠만이 존재하는 한국과 다를 바 없음이 분명한 듯 하고,
김소현이 말하는 시골은 좋은 바람 마셔가며 여전히 부부싸움하는 곳이 이 분명한 듯 하다.

다만, 말하고 싶었을 정정아 사건,에 대해 한 마디 말도 안한 마흔 살 정승희나
한 달 동안 밥도 못 먹으면서 촬영하던 PD를 피해 제주도로 훌쩍 달아난 서른살 김소현이나
스무살 이창수보다도 못난 놈인 것도 분명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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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아주 잠깐,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일상을 밥도 안 먹고, 머리도 못 감고, 카메라 테잎 50개가 든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매달고, 그 놈 드럽게도 카메라 들이미네, 라며 욕을 먹으며 찍고 있을 그 PD 아저씨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명함을 찾아야한다는 귀차니즘에 결국 접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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