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연말에 역시나, 또 <부동산 로또 맞기> 이야기가 나왔다. 한 사람은 2억으로 아파트를 사고 월급 다 받아서 땡땡 놀고 다른 한 사람은 2억 전세를 살면서 생활비를 쪼개서 다달이 100만원씩 적금을 부었는데 얼마 안 되어서 2억짜리 아파트가 재개발이 되면서 2배로 껑충 뛰었단다. 결국 펑펑 월급 다 쓴 사람이 더 부자가 되고 적금을 붓던 사람은 더 비싼 전세에서 전전긍긍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들으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학창 시절 도덕 시간에 배운 바로는 근면 성실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데 왜 펑펑 놀던 사람이 복 받는 것일까.

그런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아파트 값이 2배 뛴 것을 보고 복 받았다고 모두들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나 역시 시세 차익으로 돈방석에 앉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만한 복이 내 생에 있을 것이라 믿는 사람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물가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는 적금을 붓는 것이 소소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단순 이 두 사람만을 비교하면서 "누가 더 행복할까요?" 라고 묻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그럼 반문한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합니까?

이런 질문에 적절하고 명확한 하나의 또다른 답을 제시한 사람이 이 책의 저자, 고미숙이다. 그런 점에서 고미숙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이 책 곳곳에 돈 같은 것은 별로 없어도 정말 행복해 죽겠다고 말하고 있다. 
 
월세와 먹을거리 비용을 포함하여 대략 월 60만원을 쓴 것 같은데 그 정도의 돈으로 수많은 친구들과 접속하는 한편, 고병권, 이진경 같은 '번개 브라더스'와 밴드를 구성했고, 온갖 첨단의 지식을 주워들었으며, 길거리에서 지식을 전파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능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매달 60만원씩 붓는 적금을 들었다면 일년에 약 700만원 정도를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이 그만한 관계와 능력, 더 나아가 그만큼의 행복을 내게 주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지면 수유리 공부방 시절부터 나는 정말 엄청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 페이지 70

사람들은 어째서 젊을 날부터 그토록 노후를 걱정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일과 친구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활기차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노후대책을 위해 많은 돈을 쌓아놓을 이유가 없다. 돈이란 그야말로 최후의 거처일 뿐이다.
-페이지 115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
-페이지 275

그는 (수유 + 너머)라는 오픈된 인문학 연구 공간을 만들었고 나 역시 이번 학기부터 그곳에서 강좌를 듣게 되어 그 연구 공간의 탄생 비화를 알고자 읽게 된 책이다. 자신만의 공부방을 오픈하여 타인과 접속하고 그 관계망이 넓어지고 또다른 접속이 시도되는 과정을 제법 속도감있고 재미나게 풀고 있어서 단숨에 읽어내려 가게 된다. 하지만 분명 이 책이 말하는 <기획되지 않은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은 소위 배운자와 배우고자 하는 자들만의 잔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재개발 아파트를 갖고 있는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행복론에 반격을 가하는 행적을 기록한 것만은 사실이다.

나 역시, 신년의 첫 책으로 이 책을 만났다는 데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돈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럼 다른 방안은 무엇이냐, 라고 자문하던 차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선 되겠냐>는 고미숙의 외침은 올 한 해의 지침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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