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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이야기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평점 :

바질 듀크 리.
<바질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다.
피츠제럴드는 1928년 4월부터 1929년 4월까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연작 소설로 바질 이야기를 써냈다.
이 책엔 9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10~11세의 아이들이 키스 게임을 하는 [그런 파티]에서 바질의 이름은 테렌스로 변경되어 나온다.
설정이 맘에 들지 않았던 잡지사가 거절하자 피츠제럴드는 바질의 이름을 테렌스로 바꿔서 단독으로 팔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인지 이름은 수정되지 않고 테렌스로 적혔지만 여전히 바질의 이야기다.
서로 가까운 세대들도 있지만, 어떤 세대들 사이에는 메워지지 않는 무한의 간극이 존재한다.
[스캔들 탐정단]에서 바질은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적어놓는 노트를 가지고 있다.
아무나 읽을 수 없도록 레몬즙으로 글을 써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노트지만 거기엔 바질과 리플리가 수집한 비밀이 가득 적혀있다.
1920년대의 미국 중서부 아이들이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바질 이야기>를 읽으며 간접 경험을 했다.
이성에게 호기심이 생길 즈음 바질에겐 넘사벽 연적이 생기는데 바로 몸놀림이 환상인 휴버트다.
그를 골려줄 방안을 마련한 바질은 그를 겁주려다 되려 그를 영웅으로 만들고 만다.
이 약한 듯 강단 있고, 부드러운 듯 날카롭고, 순수한 듯 발랑까진 바질의 매력을 내가 알던 소년들 중에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우리 시대 소년들도 바질 같았을까?

그렇다고 바질이 비열한 아이는 아니었다. 남자라는 종이 불운한 자를 향해 품는 자연스러운 잔인함이 아직 위선의 탈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바질은 인기 있는 요소를 갖췄음에도 아직은 어리고, 잘난 척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기 생각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를 잘한다.
어색함을 메꾸려는 그의 노력은 다른 사람 눈에 잘난 척으로 비치고 기숙학교에 들어간 첫해에 그는 왕따가 된다.
'독재자'라는 별명이 붙은 바질에게 손을 내밀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기숙사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득의 양양했던 바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안타까웠지만 바질은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다른 수를 쓰지 않는다. 그곳에서 자신의 평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애쓰는 바질의 모습이 바질이라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지를 보여준다.
15년을 응석받이 아들로 지낸 벌인지 학교에서 '풋내기' 취급을 받은 후 그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그 탓에 남들을 관찰하며 지혜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제대로 세상을 마주하려면 자신이 힘겹게 싸우고 있었음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피츠제럴드의 모습이 담긴 바질을 보면서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남자아이에 대한 이해도가 생겼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면들을 발견할 때마다 사는 곳과 시대는 달라도 그 나이에 하는 생각들과 판단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걸 느꼈다.
예일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바질에게 뜻밖의 일이 생기지만 바질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래서 바질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바질은 바질은 포기를 모른다.
바질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가진 초연함이다.
바질은 분노로 자신을 망치지 않는다.
사랑, 우정, 학교생활에서 만만치 않은 인생 역경을 거치지만 쓰러지거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해 내며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
어떤 핑계로 자신을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내던지지 않는다.
그 모습이 참 신선했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어른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바질 듀크 리.
봄의 풋풋함과 여름의 열정과 가을의 낭만을 지녔지만 겨울의 냉기는 멀리 미뤄놓은 바질.
이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본 나는 어느새 바질의 팬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내가 세상에 없었던 그 시대에 바질은 멋진 남자가 되어 좋은 인생을 살았을 거 같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첫사랑의 순정을 잊지 못하지도 않았을 테고, 피츠제럴드처럼 술에 탐닉한 방탕한 생활로 위태로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소년이 좋은 남자가 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