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가렛 걸 ㅣ 동남아시아문학총서 시리즈 7
라티 쿠말라 지음, 배동선 옮김 / 한세예스24문화재단 / 2026년 2월
평점 :

자마리란 남자는 천식을 앓았는데 정향을 폐 안에 넣을 방법을 백방으로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정향을 잘게 잘랐고 역시 잘게 자른 연초 잎과 섞어 옥수수 속대 잎으로 막대처럼 말았다. 거기 불을 붙여 말은 막대가 다 타도록 연기를 빨아들일 때 잘게 자른 정향이 안에서 크레텍! 크레텍!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 담배에 크레텍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 크레텍 재벌 수라야는 죽음의 문턱에서 '정야'라는 이름을 부른다.
엄마가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난리를 치는 것을 보고 트가르, 카림, 르바스 형제는 정야라는 여자가 아버지의 옛 애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그 여자를 찾기 위해 형제는 고향으로 내려간다.
이 형제들이 아버지의 옛 연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생기는 이야기쯤으로 생각했지만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아버지 시대로 거슬러 간다.
이드루스 무리아와 루마이사, 수자가드 세 사람의 관계와 크레텍을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격동의 인도네시아의 시대와 맞닿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름다운 루마이사에게 청혼한 이드루스 무리아와 수자가드.
루마이사는 이드루스를 선택하고 수자가드는 그녀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한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이 들어오고 이드루스는 큰형님이 자신들을 독립시켜 줄 거라 믿는다.
그가 바라던 독립은 되었지만 일본군은 그들의 친형님이 아니었다. 자신의 크레텍 담뱃값 인쇄를 하기 위해 인쇄소를 찾았던 이드루스는 일본군에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생사를 모르는 루마이사는 임신한 몸으로 걱정하다 아이까지 잃고 만다.
그리고 그 틈새를 노리고 수자가드는 이드리스가 죽었으니 자신의 부인이 되라며 청혼하지만 또 퇴짜를 맞는다.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이드리스는 돌아와 자신만의 크레텍을 만들고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항상 그를 따라 하는 수자가드가 이인자가 되어버린 현실.
늘 새로운 크레텍을 만들어 내는 이드리스와 그를 따라 하는 따라쟁이 수자가드.
이 두 사람의 경쟁은 딸들의 운명의 상대에 의해 희비가 엇갈린다.
이름만 알던 인도네시아가 우리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는 2차대전 때 일본군에 의해 해방이 되지만 곧바로 그들에게 네덜란드 보다 더한 수탈을 당한다.
남자들은 거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여자들은 겁탈을 당한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은 한시름 놓지만 곧바로 공산당으로 인해 피의 숙청이 이루어진다.
이드리스의 딸 정야와 그녀의 약혼자 수라야는 결혼식 3주를 남겨두고 수라야가 공산당에 쫓기면서 헤어지게 된다.
맑은 강이 시체의 강이 되고 사람들은 사라진 사람들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어쩜 우리네 역사와 이리도 닮았을까...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 감독에 의해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넷플릭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많이 각색되어버려서 원작의 느낌을 잃었다는 번역가의 말과 원제 <가디스 크레텍>이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시가렛 걸>이라는 가벼운 느낌으로 희석된 걸 안타까워했다.
나도 책을 읽고 나자 <시가렛 걸>이라는 이름이 처음에 비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작가는 17세기 마타람 왕국 시대에 살았던 라라 먼둣의 고사를 통해 정야를 라라 먼둣의 화신으로 표현했는데 그저 '담배 마는 아가씨'로 표현되었으니 그 미안한 마음은 읽는 독자의 몫이다.
읽는 동안 담배를 안 피우는 나도 이 크레텍의 맛이 궁금해졌다.
정야의 침으로 말은 팅웨는 어떤 맛이길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3대에 걸친 이야기가 따스하게 마무리되는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맘에 들었다.
복수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고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속담도 생각나고
사람의 인생은 각자의 시선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도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는 걸 확실하게 느낀 이야기였다.
복잡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아닌
정갈하고 담백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데 마음에 온기가 스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