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와이프
어설라 패럿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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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남편이 나를 떠났다.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예전에도 몰랐다. 내 생각엔 남편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당시에는 재앙처럼 보였던 그 일도, 그렇게 된 이유도 똑같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된 요즘은, 남편이 떠날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을 때 내가 지나치게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를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점점 믿게 된다.


어설라 패럿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새해를 맞이하면서 책복을 받은 느낌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전처'로 살아야 하는 주인공 패트리샤의 모습을 통해 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간접 체험했다.

전처나 전 여친이다 법적인 급만 다를 뿐 다를 건 없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사랑을 원치 않게 끝내게 된 모든 여자들이 느꼈던 감정의 혼란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이야기다.

그러니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여자라면 힐다처럼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남자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던 패트리샤의 순진한 마음에도 가닿지 않을 것이며,

먼저 전처의 길에 들어서서 온갖 감정의 풍파를 다 겪어내고 스스로 안정된 삶을 택한 루시아의 현명함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방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진 사람들은 버림받은 느낌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언제든 돌아올 상대를 기다리며 마음과 몸의 방황을 한다. 마치 풍선인형처럼 흐느적 거리게 된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를 곱씹으며, 언제든 그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패트리샤에게 루시아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자들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지 않는다.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지도 않고, 잘못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서 인상 깊다.







이혼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사건이다.

재즈 시대의 자유와 방탕함 속에서 '전처'라는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엑스 와이프>

작가의 경험담이 녹아 있어서 그런지 감정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루시아가 말하는 전처의 세 가지 부류>


첫 번째 부류는 독신주의와 사업적 성공을 추구해.

두 번째 부류는 '사랑은 끝났고, 남은 건.... 모험을 하며 돌아다니는 거지.'

세 번째 부류는 다시 결혼할 거야.




루시아는 세 번째 부류가 되려 하고, 패트리샤는 두 번째 부류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전처에 대한 예리한 분석력과 패트리샤를 통해 보여주는 감정의 변화들은 가히 수준급이다.

정말 내가 패트리샤가 된 기분이었다.



산부인과 진료실의 분위기와 이혼 법정의 분위기를 오버랩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살면서 뜻하지 않는 곳의 기억들이 중첩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포착해낸 작가의 센스가 매력적이다.


패트리샤와 루시아의 대화가 너무 좋았다.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하게 전통적 가치관에 매달리는 인간적 복합성을 보여주는 피터.

그로 인해 감정적 방황을 하는 패트리샤는 루시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며 한 발 한 발 홀로서기를 한다.


이 이야기는 '전처'라는 이미지를 이혼녀의 틀에 가둬두지 않고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부여한다.

1920년대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세련됐다.

자유와 해방감 속에 드리워진 외로움과 불안이 '전처'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여성들은 서로 연대한다.

패트리샤는 피터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는 더 멋진 여자가 되었다.

베아트리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패트리샤의 행동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로 확장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을 두고 잠수해 있다가 이 시간대에 새롭게 세상에 나온 거 같다.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지 세상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고통과 아픔을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자극을 주며 그걸 이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패트리샤와 같은 처지에 있는 그녀들에게 루시아 같은 언니가 되어주어야 한다.

언제 나 자신이 패트리샤가 될지도 모르니까.


온갖 상황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패트리샤와 그녀를 지켜보며 손을 내밀어 주고 좋은 충고를 해주는 루시아 같은 여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감정적으로 성숙해져야 가능한 일이다.



소설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아직 성숙하지 못한 감정 한 부분이 부쩍 자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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