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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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레나가 가지고 있을지 모를 어떤 확신을 깨고 싶다. 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표정엔 그런 확신의 징표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첫 장편은 어떤 느낌일까?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생각이었다. 난해한 글이나 추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건 아니겠지?

읽어 본 적 없는 시인의 소설 데뷔작 <네가 누구든>은 한적한 교외를 배경으로 스스로를 은둔시킨 미티와 그의 옆집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입주한 레나, 그리고 미티와 동거하는 베델이라는 나이 든 여자 셋이 중심인 이야기다.


바닷가 마을.

IT 재벌들의 별장이 속속 들어서는 그곳에 오래된 베델의 집은 새 건물들 틈에서 초라해 보인다.

마치 그곳에 사는 미티와 베델은 오랜 시간 그 땅의 주인이었음에도 새로운 건물의 주인들로 인해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유리의 성 같은 새집에 이사 온 레나와 서배스천.

미티는 그들을 훔쳐보며 자신의 삶을 비로소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미티가 그곳에 은거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무엇이 이 젊은 여인을 답답하리만치 그곳에 묶어 두고 있을까?


새로 지어진 집들에 머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취미가 있는 미티.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품평을 하던 미티에게 레나의 삶이 갑자기 훅 다가온 이유가 뭘까?






이 이야기의 배경은 바닷가의 한적한 교외 도시다.

주변은 공유 주택들로 매번 다양한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다.

미티와 베델만이 그곳의 마지막 남은 거주자들이다.

이 배경이 뜻하는 바는 아마도 끝없이 바뀌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미티는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그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숨기기 급급하다.

교류 없이 훔쳐보는 삶을 선택하는 미티의 마음에 레나라는 이웃이 들어온다.

레나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아마도 미티가 여자를 좋아하는 성향이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일차원적이었다. 

미티의 레나에 관한 관심은 그녀가 자신과 같은 은둔자의 역을 맡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미티는 스스로를 고립시켰지만 레나는 서배스천에 의해 강제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미티는 레나를 관찰한다.

레나는 스스럼없이 다가오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베델마저도 레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한편 걱정을 한다.

통제광에게 잡혀사는 여자라는 인상을 풍기는 레나.


그들은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과거를 캐고 레나는 자신의 과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위험한 생각.

스스로를 확인하기 위해 자해하는 레나.

그러면서 미티에게 자신의 틀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레나.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며 쓸데없는 참견을 하지 않는 베델.


은둔자들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서로의 용기가 되는 모습은 뭉클하다.


IT 기술자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스릴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스릴러의 맛을 첨가했을 뿐 스릴러가 아니었다.

성장과 연대의 이야기였다.


미티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던 베델의 과거

레나에게만 고백한 미티의 과거

자신의 과거를 확인하러 가는 레나

끝없이 자신의 삶과 딸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맹렬하게 살아내는 퍼트리샤.


베델은 그 자체로 과거의 상처로 스스로를 가둔 사람이자 은둔을 택한 미티에게 엄마 대신이자 가족 대신의 보호자 역을 한다.

미티는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레나에게 의지처가 되고 친구가 되어준다.

레나는 미티를 은둔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용기를 준다.

퍼트리샤는 늘 딸이 돌아올 그때를 위해 기다림을 준비해두고 있다.


남성들과 사회적 시선 속에서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야만 가치를 인정받는 여성.

베델과 미티는 그런 여성들이 아니다.

하지만 레나는 완벽하게 여성으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는 미티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델마와 루이스>가 오래도록 회자되는 이유는 여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시선을 박차고 함께 달려나간 우정에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소리나 듣고 자랐던 나에게 이런 관계들은 가슴 벅차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질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다시 새기게 되었다.


미티가 꿈꾸듯 레나가 자신의 집에서 의심 없이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미래에 AI가 좀 더 인간적인 감정을 탑재한다면, 끊임없는 학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간과 비교하며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고통받을 수 있음을 미리 체험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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