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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ㅣ 위픽
박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평점 :

기록되지 못하는 글이 되어 허공중에 흩어진다고 해서 치욕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제 몸을 이용해 그런 식으로 반복해서 토해내는 동안 그 어두운 기억들이 조금은 희석되기를 바랐다.
66세가 되면 생애전환기에 들어가는 법이 있다.
20년 전 생애전환기 전환을 결정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편안한 생활을 영위한다.
승혜는 자갈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빚이 있으면 자연 상태의 무생물로 전환하기 전에 그 빚을 갚을 쓸모 있는 유보된 생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승혜는 타자기가 되었다.
빈티지 숍에서 타자기가 된 승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체험한다.
그날 밤 승혜는 서늘한 창가에 자신의 몸을 뉘어놓고 그날 들은 타인의 습기 어린 기억을 달빛에 널어 잘 건조시킨 후 고운 결로 다듬고 접어 소중히 보관하며 생각했다. 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 온몸을 내어주고 있는 지금이 인간 여자 고승혜의 삶까지 통틀어 자신이 가장 뜨겁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독특한 소재지만 미래를 잠시 그려볼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나는 생애전환기를 선택하게 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길 선택할까?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나는 결정을 못 했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고승혜.
자갈이 되고 싶었던 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 가면서도 선명하게 남은 기억 하나.
맨들맨들
몽글몽글한 몽돌.
파도가 수없이 스쳐서 맨들맨들해진 자갈.
승혜는 자갈이 되어 파도가 된 인애를 만나고 싶었다...

인애가 파도가 되지 않았으면 어쩌지?
이런 현실적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친다.
이것도 인간으로서 살았던 인연이기에, 인간사가 모두 예상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그럼에도 쓰이고 싶고, 기억되고 싶고,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쓰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상태가 가장 되고 싶은 형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얇고
가벼운 이 작은 책에 든 세상은
넓고
무게감 있는 세상이었다.
나는
지금
잘 쓰이고 있나?
잘 기억되고 있나?
그리고
잘 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