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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평점 :

"이런 사건에 전문가는 그밖에 없습니다. 최고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최악이기도 하지. 이제 우리 사람도 아니잖나. 다행스럽게도 말이야."
라켈을 잃고 오슬로를 떠난 해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술에 절어있다.
가진 것을 다 술로 탕진하고 나면 죽을 계획을 품고.
해리의 시간이 술로 채워지는 동안 오슬로에서는 새로운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
피해자의 뇌와 눈을 가져가고 나중엔 목을 가져가는...
카트리네는 이런 사건에 최적인 해리를 불러오려 하지만 그의 상관은 절대 반대다.
한편
주변의 여자들이 차례로 시체로 발견되자 제1 용의자에 오른 부동산 부자 뢰드는 변호사를 통해 해리 홀레를 수배한다.
그를 통해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어머니를 연상하게 하는 루실의 빚을 대신 갚아주기 위해 해리는 뢰드의 초대에 응한다.
그렇게 그는 불행한 상처로 가득한 오슬로로 96만 달러에 팔려 돌아온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이 최고가 되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게 바뀐다는 걸 알아요."
다시 돌아온 해리는 어딘지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그동안 지니고 있던 묵직한 고뇌 어린 모습이 사라진 거 같아 낯설다.
미국 술을 마셔서 그런가?
흐느적거리는 퇴폐미에 절여져 있던 홀레의 분위기는 스마트함이 느껴지는 세련미를 뿜어낸다.
비싼 양복 탓인가?
술에 절여져 있어도 술 냄새가 나지 않고, 고통 속에 갇혀 있어도 그 느낌이 안 난다.
아마도 달라진 번역가의 입김이 오래된 홀레의 맛을 날려버린 거 같다.
아동 성범죄, 근친상간, 식인, 기생충을 이용한 살인.
기생충이 사람을 그렇게 조종할 수 있다니... 요 네스뵈는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 걸까?
수많은 미치광이 연쇄살인범을 소설 속에서 만나봤지만 이런 기발한 수법을 쓰는 살인범은 처음이다.
이것조차도 범인의 계획에 없었던 살인이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게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다.
그러니 파티에서 함부로 아무거나 맛보지 말 것!
"미안해, 카트리네. 나도 이제 유통기한이 지났나 봐."
"그래요?"
"이 빌어먹을 사건에서 내가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엉뚱한 표적을 겨눈 게 벌써 세 번째라고. 나도 이제 고물이 된 거야."
해리의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한국계 입양아 성민이 새로 투입되어 이야기의 초점을 흐려놓는다.
그래서 나도 헷갈렸다.
요 선생은 이런 트릭을 아주 맛깔나게 잘 써먹는다.
익숙한 인물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그동안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이제 해리는 경찰이 아니고, 경찰의 독보적인 존재감에서 벗어났다.
그는 오로지 친근한 사람들의 조력과 그의 머리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그가 만든 새로운 팀이 다음에는 더 큰 활약을 할지 궁금하고, 그동안 해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에우네의 죽음이 안타깝다.
요 선생은 해리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려는 걸까?
술을 끊겠다는 다짐을 하는 해리가
맹렬한 느낌은 사라지고 담백함이 남은 해리가
경찰로서가 아닌 탐정으로서 조금 가벼운 행보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해리에게 또다시 가장 소중한 것이 생겼으니까.
해리가 짐빔과 멀어지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그 소중함을 지켜내고 싶고, 모범을 보이고 싶어서인 거 같다.
지탱할 무언가가 생겼기에 해리에겐 그와 함께 성장할 미래가 생겼다.
그 미래는 과거의 어둠을 묻어둘 만큼 찬란하다.
여자를 사랑하는 해리보다
아들을 사랑하는 해리는 훨씬 더 생명력 있다.
그래서 <블러드 문> 다음 행보가 더욱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미래에 걸맞은 분위기로 해리를 탈바꿈 시켜준 새로운 번역에도 좋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