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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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히 생각해보게. 정답은 반드시 자네의 마음속에 있을 테니까." 닛신 대사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네의 인생,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 속에."



공포 중에는 직접 마주해서 공포스러운 게 있고, 마주하지 못했지만 기억 속에서 문득 재생되는 것이 있다.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가 기시 유스케가 아닌가 한다.

<가을비 이야기>에 이어 비를 소재로 한 이야기 중 <여름비 이야기>를 읽었다.

하이쿠, 꿈, 버섯을 소재로 한 세 가지 이야기엔 범죄를 잊고 살아가는 살인자들이 존재한다.

가해자는 잊고 편히 살아고 피해자는 어둠 속에서 잊혀진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든 고개를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가해자들이 가장 평온할 때를 기다리며...





아무리 제거해도 자라나는 버섯이란 건, 심리학을 배운 사람 쪽에서 보면 죄책감이 낳은 환영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죄책감을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오히려 반동이 강해진다. 그야말로 <버섯>의 결말처럼.



하이쿠를 알았다면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 <5월의 어둠>

치매에 걸린 하이쿠 선생이 제자의 하이쿠 시집에서 살인의 흔적을 발견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꿈속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상기시켜줌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가서 죄의 흔적을 탐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쿠토 기담>

버섯의 경고는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버섯>

이 세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

살인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

잊고 살아간다 해도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오는 죄의식이 자신을 좀먹어 간다는 걸 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死者)의 감정이 응축된 영체는 버섯의 포자 같은 미립자 위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어요. 하지만 그건 보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서, 자세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게 함으로써 겨우 영상으로 인식할 수 있죠."

"하지만 감정이 빈약한 사이코패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더군요."



세 편의 이야기에서 두 편은 범인을 감지했으나 나머지 한 편은 속아버렸다.

잔인한 장면들에 노출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버섯처럼 심심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자극에 덜 노출된 눈에는 문득문득 소름 돋는 이야기다.


이 세 편의 이야기에 나오는 살인범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사회적 명망이 있고, 모두 감쪽같이 자신을 지켜낸 인간들이라서

그들의 평범성이 죄를 감춰주었지.

그러나 죄를 감지하는 눈은 어디에나 있다.

그 눈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매번 찾아와 기억을 일깨우거나, 꿈속에 찾아와 정신을 갉아먹거나, 보이지 않는 환영으로 그를 지목한다.

기시 유스케가 들려주는 봄비와 겨울비의 이야기도 얼른 읽고 싶다.

이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죄짓고 사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역의 길임을 느끼게 된다.

죄의 단죄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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