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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8
제인 오스틴 지음, 김지선 옮김 / 빛소굴 / 2025년 7월
평점 :

샬럿은 남자나 혼인 관계 자체를 딱히 중시했다기보다는 결혼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 교양은 있지만 재산은 없는 아가씨가 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은 오로지 결혼뿐이었고, 결혼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해도 궁핍하지 않은 생활만은 보장했다.
오래전 읽고, 영화도 다양한 버전으로 봤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이제 재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이번에 빛소굴 세계문학으로 읽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 이야기 엄청 수다스럽다.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치는 말의 향연들 앞에서 마치 내가 그 장면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 시대 여성들의 삶이 참 만만치 않게 치열했을 걸 생각하니 답답하면서도 이렇게 까발릴 수 있었던 제인 오스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시대와 그 시대 사이에 달라진 게 뭘까?

읽으면서 나오는 등장인물의 등짝을 모두 한 번씩 패주고 싶었다.
베넷 부인과 리디아에겐 그 입 좀 닥치(?)라고 소리치고 싶었고
콜린스씨에게는 마스크를 씌워주고 싶었고
내가 제인 오스틴이라면 위컴씨는 정말 군대에서 사고사로 위장시키고 싶었다!
어쩜 그리 철면피들인지!!!
위컴 부부가 살아가는 내내 기생충이 될 걸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건 나뿐일까?
그 안에서 소소한 위트를 날리며 혼자만 독야청청하려던 베넷씨.
정말 서재에 박혀만 있음 아버지 노릇 다 하신 게요??
그 와중에 제인과 엘리자베스 정말 선전했다!
샬럿은 자기가 능히 다룰 수 있는 남자를 선택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약삭빠른 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 그녀에게 예전엔 못 느꼈던 감정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나이를 먹고 결혼을 했기에 그런 거 같다.
참나.
아들이 없다고 재산을 딸들에게 주지 못하고 핏줄이 닿은 남자에게 줘야 한다는 법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걸까?
마치 생색내듯이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이라는 걸 하는 콜린스의 모습에 얼마나 많은 엘리자베스들의 자존심이 뭉개졌을지를 생각하니 내속이 문드러진다.
<오만과 편견>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 같다.
이런 비이성적인 법 앞에서 자신이 누려야 할 정당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눈물을 제인 오스틴이 만천하에 알렸기 때문이다.
결혼밖에는 답이 없던 시대.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시대에 제인과 엘리자베스는 선택함과 동시에 선택받았다.
예전엔 엘리자베스의 통통 튀는 생각들이 좋았다면 이번에는 제인의 남에 대한 생각들이 좋았다.
쉽사리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려 하고 상대의 좋은 점만을 생각하려 하는 제인의 태도가 더 와닿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걸까?
서슬 퍼런 신랄함보다는 섣부른 판단은 미뤄두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점들을 발견하려는 제인의 노력이 더 눈에 보이는 건 사람에 대한, 상황에 대한 판단에서 내가 가진 오만과 편견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직관적인 사람이라서 첫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가 느낀 것들을 거침없이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엘리자베스 스타일이었던 내가 점차 제인스러워지는 건 아마도 살아가면서 겪었던 일들에 대한 반성 때문인 거 같다.
고전이 좋은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에 대해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베넷 부인과 리디아, 콜린스와 위컴 같은 작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베넷 씨처럼 조롱하며 상황을 관조하는 사람과 엘리자베스처럼 직진으로 내달리는 사람.
샬럿처럼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과 제인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낙관적인 사람.
빙리처럼 우유부단하지만 다정한 사람과 다아시처럼 츤데레 같은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을 겪어 보면서 나는 점점 엘리자베스에서 제인처럼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좋은 것들은 흔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어 보자.
<오만과 편견>
글을 읽는데 오디오북을 듣는 기분이었다.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재밌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