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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6월
평점 :
품절

이민자의 신이 이민자들에게 내리는 복이자 벌, 축복이자 저주, 가호이자 징크스는 바로 산산조각 난 정체성이다. 그 조각들은 계속해서 다르게 조합되고 결합하며 모양을 바꾼다. 이것이 인간들에 대한 나의 강한 비위를 만들어낸 것이다.
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해지는 십 대의 어느 한 시절.
낯선 나라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내야 했던 한 소녀의 성장기에서 나는 내 과거와 마주쳤다.
사람 사는 곳은 다 어디든 모양새가 같아서 제니가 거쳤던 그 감정들을 나는 내 나라에서 겪었다.
인종차별만 못 겪었을 뿐 제니와 한나의 이야기에서 그 어떤 부분도 그냥 걸러지는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폭풍 같은 감정의 휘몰아침이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감정 묘사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는 작가의 글에서 그가 감내한 고통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적응은 단순히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몸의 모든 틈을 활짝 열어젖혀서 세상의 온갖 돌기를 도킹 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은 반항을 못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도 든다.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출발했던 이민자들의 가정들이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에 대한 간접 경험이 너무 아프다..
그들의 고생과 설움과 고달픔이 서로에게 바늘이 되어 서로를 찌르고, 보듬어지지 못한 여린 영혼들이 처참하게 부서지는 과정이.
그럼에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을 보듬어 보려는 노력들이 아리디 아리다...
입학한 첫해 동안 일기를 쓸 때마다 서럽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서럽다는 'sad'와 달라서 더 길고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서러움은 억울함이 잔뜩 섞인 답답한 슬픔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밑바닥에 자글자글 깔린, 그런 슬픔이었다.지금 내 인생에서 그때의 흔적들은 보이지 않는다.
제니의 인생에서도 그 흔적들이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테지.. 하지만 느닷없이 과거를 비추는 글들과 마주하게 될 때면 욱신거리는 아픔이 전해져 올 것이다. 시간이 약인 만큼 그 감정들은 오래될수록 조금씩 아문 느낌이 날 것이다...
제니가 한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보고 그것을 사지로 몰아가는 행동으로 보는 사람들.. 알 수 없는 언어는 간절한 외침마저도 절박한 행동마저도 오해를 몰고 온다...
지금 케이팝의 시대에서라면 저 장면은 어떻게 해석될까?
힘없는 아시안에게 자신들의 죄를 몰아버린 그치들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제니와 한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줬던 테일러 역시도 그들이었다..
아니면 자신을 위한 외면이었을까?
아무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을 때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 이는 가장 고통스러운 이었다...
폭력을 견뎌낸 사람만이 폭력 앞에 널브러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법이지..
송곳 같은 글들이 부당함에 대해 말한다.
생생한 기억의 파편들이 혼란한 감정들을 엮어낸다.
살아있는 감정들의 파도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멀어진다.
책을 읽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이 이야기가 드라마가 되어 그때의 제니와 한나의 마음을 그들에게 전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무시하고, 조롱하고, 장난으로 여겼던 그 사람들의 감정이 어떤 거였는지 너희도 느껴보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린 모두 똑같은 걸 답습한다.
인간의 DNA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알려줘도 직접 경험해야만이 각인되는 것들이 있다.
진정한 존중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처럼 무서운 것이 또 있을까...
질풍노도의 시간에 나는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그 상처들이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불끈 솟구쳐서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송곳처럼 만들 때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니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준 어른이 있어서 다행이다.
제니가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건 그 한 마디 때문이었을 테니까.